평균수명이 계속 길어지는 요새에 와서는 60 이면 노인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심하게는 인생은 바야흐로 60 부터라는둥 웃기는 소리도 보통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하면 60이라는 나이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물적인 존재로서는 물론이려니와 이성적인 존재로나 또 사회적인 존재, 그 어느것으로서도 절정은 이미 지난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상당히 내리막 길을 걸어오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앞에 있는 시간은 사실 아무도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면서도 항상 상당히 길게 남아 있다고 생각이 드는 반면 지나간 시간은 누구에게 물어봐도 눈깜짝할 사이에 흘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렇게 짧은 인생 60년도 어린시절의 신체적인 성장기를 빼고도 청년기, 장년기, 중년기, 노년기의 자연적인 구분이 있다. 또 물론 각자가 각분기에 들어 갔다가 다음분기로 넘어가는 나이나 계기 또는 자각등이 다 다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중 한 분기를 월반하거나 어느분기에 계속 유급을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또 확실하게 공평한 것은 누구나 똑같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자님 말씀에 젊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자신을 닦고 준비하면 인생 삼십대에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세워 소신껏 일을 할수 있게 되고(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한십년 열심히 일을 하고 나면 자신의 주관이 확고해지고 시비를 가리게 되기 때문에 쓸데없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四十而不惑) 그러한 경지에서 계속 수양이 되면 하늘의 뜻을 혜아리는 현명함과 모든 인간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또 남과 더불어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상태(五十而 知天命 六十而 耳順)에 이른다고 하셨다. 이러한 순서와 노력으로 일생을 살면 그것은 가히 군자의 일생이고 좀 더 하늘이 어여삐 보신다면 보너스로 십년을 더 받아 칠십이상을 살게 되는데 그때야 말로 아무리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 봤자 별로 법도에 어긋난 짓을 할 수가 없다고 하셨다.(七十而 從心所慾 不踰矩) 이쯤되면 이것은 이미 도인이나 신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옛날에 70을 넘게 살면서 각단계를 착실히 밟아 군자의 일생을 살 수 있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 것인가.

요즈음 사람들이 나이를 얘기할 때 40이면 불혹, 50이면 지천명, 60이면 이순이라고 쉽게 바꾸어 말하는 것을 듣자면 상당히 거북한 때가 많다. 앞에 든 공자님의 말씀은 그냥 해가 가서 밥그릇만 채우면 저절로 불혹이니 지천명이 따라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리적인 단계인 청년기나 장년기, 중년기나 노년기도 단계적으로 뛰어 넘을 수가 없는데 인간의 정신적인 성장단계야 말로 그 전단계의 착실한 학습이 끝나야 얻어 지는 것이지 그냥 그 나이가 되었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또 한단계가 끝나고 새단계가 시작될 때 그것이 전단계의 누적위에서 추가 진행되는 것이지 별개의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즉, 젊어서 공부를 시작하면 일생동안 공부를 계속 해야하고 주관을 세워 일을 계속해야 不惑이고 知天命, 耳順이 그 위에 추가 되는 것이다.

80을 보통으로 살게 된 요새 세상에서 각자가 어느때,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많이 없어졌다. 연장된 성장단계에서 좀 게으름을 부리다가도 늦철이 들어 대기만성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은 유한하다는 냉엄한 사실을 받아드리기 때문에 자연의 순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각 연령대의 현상을 우선 충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이 일과성이고 단 일초도 똑같은 것의 반복이 될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에는 푸근한 사랑속에서 정말 꿈같은 몽상을 많이 해야 한다. 청년기에는 풋익은 기개로 국가나 인류의 장래에 대한 순수한 이상에 불태우는 한편 백합보다 더 지순하다고 믿는 뒷집 소녀나 남이야 뭐라해도 나는 좋은 여드름 투성이의 이웃집 총각을 향한 연정에 안타까운 밤들을 하얗게 새워 보아야 한다. 그러고난 후에야 30대에 책임감 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한 가정의 착실한 부모의 역할을 맡아 나갈 힘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버릇처럼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대개 이런 분들은 젊음의 단계에서 뭔가 미진한 어정쩡한 불완전 연소의 찌꺼기를 붙들고 있는 경우이다. 20대에서, 30대에서, 40, 50대에서 각 각 충만한 삶을 누렸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은 과거의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충만한 삶을 누렸다는 말은 듣기에 어폐가 있겠지만 실로 이것은 주관적인 것이므로 자신의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다. 공자님처럼 철학적으로 정신성숙단계를 하나 하나 귀하게 받아들여 나이먹는 것이 진정 자랑스러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나 저나름대로 인생의 각 단계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또는 여건 때문에 손해를 보았다거나 희생을 당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이 드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반면에 남보기에는 별로라도 자신이 '이만하면 됐지' 정도로라도 감사한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인간성숙일 것이며 그 훈련은 젊어서 시작해야 한다.

내게 있어서는 만 40이 되던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얽힌 사연이 많기 때문이다. 20대의 풋내기 시절 이 세상은 온통 환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우리끼리 문득 문득 40대의 어른들은 무슨 재미로 살까를 상상해 보았다. 별로 살 재미없고, 별로 희망도 없고, 별로 보기 좋지도 않다는 결론에 언제나 도달하고는 우리 꼭 잊지 말고 40이 될 때 알아 보자고 철딱서니 없는 농담을 했었다. 참 그때로서는 40이란 까마득하게 먼 앞날이었다.

우리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어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낳아놓고 다시 학생이 되어 30대의 초반까지 정말 힘들고 여유없는 유학생 가족노릇을 했다. 그때 나는 어려서 하던 생각을 하면서도 별 재미 없어도 좋으니 빨리 시간이 흘러 40이 되었으면 하는 소리를 푸념처럼 했다. 어쨋던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테니까.

드디어 마흔살이 되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면밀히 성찰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20대에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때 과연 뭘 안다고 까불었을까에 대해 심히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때 50대나 60대 혹은 70대에 계신 분들에 대해 내가 20대에 알지도 못하고 경망스러운 결론을 40대에 대해 내린 것같은 짓은 적어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때는 또 40대가 가장 중요한 인생의 단계 같은 생각이 들었다. 20대에 성인이 되어 길게 잡아 60대까지 사회생활을 한다면 40대는 꼭 한가운데가 된다. 제도적인 교육에서는 공부도 할 만큼은 했고 사회경험도 쌓을 만큼은 쌓였고 막내도 웬만큼 키워놓은 나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의 삶이란 너무도 빡빡하고 여유가 없었다. 한눈팔까봐 눈을 가리고 채찍질을 받으며 뛰기만 한 역마같은 생활이었다. 아,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뛸 기운이 빠졌다고 느낌과 동시에 갱년기의 허탈감이 오는 것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남편에게 우리의 생활양식을 조금 바꾸고 숨 좀 돌리면서 우리가 한창 힘들때 그려보던 40대의 여유있는 생활을 찾아보자고 하였다. 그러나 한창 일에 온정신이 다 빠져 있던 그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또 그 당시 그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었다.

둘이서 같이 할 수 없다면 우선 나라도 좀 바꿔보자. 내가 집안을 돌보는 사람이니까 나라도 좀 정신적인 여유가 있으면 우리둘에게 다 좋은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것일테니까...

아전인수격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동안 내자신이 너무 과로하고 살아 왔다는 느낌때문에 내자신을 우선 좀 귀하게 대접해주기로 하였다. 나중에 올지도 모르는 '자식때문에, 남편때문에 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 않도록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할 것 같애서였다. 또 그 방법도 아주 간단한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작은일로 시작하였다.

내가 곰곰히 생각해서 만들어낸 생활개혁안의 항목을 남편에게 내밀었더니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그리고 좀 실망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뚱 했다. 겨우 이런 것들에게 지금까지 무슨 대단한 속박을 당하고 살아 왔느냐고 웃었다.

내 리스트에 적혀 있던 것들은 어찌 보면 너무 하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 그중 몇가지만 말해도 시장가서 물건값 외우고 비교하지 않기, 싱싱한 꽃은 마음내킬때는 언제나 사기, 책값, 연극, 음악회표값 아까워하지 않기, 상에서 남은 음식 아깝다고 먹는 것 절대로 안하기, 일년에 적어도 한두번 단둘이서 빈 손으로 집을 떠나 자연속에서 하룻밤이라도 자고 오기, 하루에 30분 이상 운동하기...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공자님은 물론 남편도 속으로 ' 참으로 아녀자란 별 수 없군...' 하고 웃었을 일들이었지만 내가 몸에 익숙해져서 자유를 느끼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들었다. 꽃을 집었다가도 이 돈이면 아이들 과일 하나라도 더 사야 하지 않을까, 어제는 시금치 한단이 얼마였는데 오늘은 얼마니까 사자 혹은 사지말자 같은 하찮은 결정으로 내 머리는 언제나 꽉차 있었던 것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물론 내가 정했던 것들을 꼭 지켜야 할이유는 없었고 또 지켜지지도 않았지만 이런 것을 정해놓고 실행함으로서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한다는 것이 기분을 다르게 했다. 이런 것들이 내 인생의 각 단계를 다른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나의 의지의 작은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지독히 알뜰하게 살림하고 저축하고 개미같이 일하고 제식구만 알고 젊은 날을 살았으면 중년 이후는 좀 여유있게 자신의 정서도 보살피며 기분도 맞추어 주는 것이 남과도 많은 것을 나누며 베풀고 사는 생활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런 경제적이나 기타 물리적인 여건도 모두 주관적인 것이니까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젊은날의 알뜰정신이 사람을 찌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풍요하고 아름다운 경험으로 중년 이후의 여유를 감사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 사이에 50도 중반에 접어든 이 나이에 지천명은 커녕 불혹의 경지도 어림 없지만 그냥 단계 단계를 소중하게 살았고 하늘의 뜻을 알지는 못해도 그대로 받아 들이는 노력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하고 오래된 제자들이 오래간만에 찾아와서 듣기 좋은 소리라고 '선생님 마음이 젊으시니까 나이가 비켜가네요' 할 때마다 웃으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이 먹는 것도 학점 따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 것이지 공짜로 오는 것이 아니란다. 너의들 왜 내가 애써 따놓은 학점 깍으려고 하니?'

나를 아는 제자들, 친구들이 자주 꽃을 갖다주고 이제는 시장에 가서도 안경 없이는 잔글씨의 가격표가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40에 내자신에게 한 약속중 몇가지는 자연히 계속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