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 중 대부분이 우리나라의 가을날씨와 비슷하고 우기라는 겨울 한철에도 어쩐일인지 비는 대개 밤에 오는 때가 많아 낮에는 해가 나면 비에 씻긴 수목의 싱그러움에서 공기에 넘치는 생명의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년이 지나고 또 일년이 지나면서 아름다운 자연이나 쾌적한 날씨가 주는 감격이 약해지고 나중에는 그것은 당연히 있는 것이지 특별히 감지덕지해야할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오년 가까이를 그곳에서 살다가 귀국을 한 것이 하필이면 팔월초의 찌는 듯한 장마 더위 막바지였기에 나는 비로소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안타까운 향수를 속으로 삭이며 온몸이 땀띠 투성이가 되어 보채는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에도 좀 있으면 시원하고 아름다운 가을이 꼭 온다는 것을 기약해 주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은 유난히 아름답고 시원해서 내가 멋대로 아이들에게 해준 약속을 져버리지 않게 해 주었다. 그 해 가을이 그토록 찬란하게 아름답고 상쾌하게 기억되는 것은 힘들고 짜증나는 무더위와 장마를 견딘 댓가로 얻은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더욱 값지게 느낀 것이리라.

그 후 나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의 기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살게 되었다. 변화없이 쾌적하기만 했던 캘리포니아의 생활은 편안하기는 했다. 하기야 기후의 변화에서 오는 긴장이나 이완이 없이도 우리 생활은 늘 충분한 기복이나 스트레스가 있으니 계절의 변덕까지 추가해야 사는 맛이 나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겠지만 계절적인 변화같이 정직하여 믿을 수 있고 그러면서도 번번히 새롭고 신선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또 있을 것인가.

어려서 학교에 가기 싫은 이유에서 방학이 긴 겨울과 여름을 좋아 했다. 또 추위나 더위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던 그 나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른들이 좋아한다는 봄 가을을 좋다고 맞장구를 치기가 싫어서라도 늘 나는 겨울과 여름을 내세웠다. 날카롭게 추운 겨울날 오후의 투명한 햇살의 찬란함이며 보얗게 흐린날의 아늑한 설경, 또 정직하게 본색을 드러내고 서 있는 나목의 개성있는 아름다움에 늘 감격했다. 또 여름은 여름대로 얼마나 좋은가. 작열하는 태양과 기세좋은 녹음, 천둥번개를 몰아오는 세찬 소나기에서까지 생명의 박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그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어느 구석에는 시간이 정지된 듯 길고 한가한 오후의 정적속에서 나른하게 빠져들 수 있는 낮잠의 달콤함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도 별 수 없이 생활인이 되면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봄가을이 여러가지로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봄보다는 가을의 의미와 아름다움이 절실하게 마음에 와닿게 된것은 내 나이가 바로 인생의 가을같이 느껴지기 시작한 후부터이다.

봄은 새로운 생명을 발동시켜야 하는 한편 여름의 성장과 가을의 결실까지 치달아 가야하는 힘을 비축해야 하기때문에 너무 바쁘고 벅차서 여유가 없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편치 못하여 훈훈한 바람마저 조바심에서 오는 미열같이 느껴진다. 봄여름의 엄격한 채찍에 몰려 온 생명의 행진은 가을에 들어서면 그 동안의 노고에서 당연히 오는 결실을 알기때문에 그 속도를 늦추고 차차 관성의 힘으로 변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여유있게 뒤를 돌아 보기도 하고 주위를 살필 수 있게 된다. 결실의 풍요로움과 성취감이 가져다주는 넉넉한 마음, 생명의 마지막 불꽃을 아낌없이 태우는 찬란한 단풍과 가을꽃의 경쟁, 쾌적한 날씨,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곧 다가올 춥고 어두운 겨울까지도 아늑한 안식으로 미화하고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가을에는 있기 때문에 한동안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 하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은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을 나에게서 빼앗아 갔다. 나는 가장 소중한 사람과 가장 아름다운 계절을 동시에 잃었다고 생각했다. 여러해동안 가을의 강렬한 햇살과 현란한 색깔이 비수같이 나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내었다. 색맹이 되기를 원할 정도로 색과 빛은 실제로 감각적인 고통 을 주었다. 상복을 너무 오래 입는다고 주위사람들이 성화를 댔지만 나는 그저 몸에 대어서 아프지 않은 소리없는 색의 옷을 입었을 뿐이지 상복을 입은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큰 상실감과 허탈감에 짓눌려서 그것들의 텅빈상태에 그렇게도 큰 무게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의 감각기능은 완전히 고장이 난듯 모든 자극은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전제로 한다.

내가 가을을 사랑하고 그것을 나의 계절이라고 정해놓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전혀 소유감정이 개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가을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거들떠 보지 않은 동안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내 옆에도 와서 할일을 하고 있었다. 여러해가 흐른 후에야 나는 우연히 떠났던 짧은 가을여행에서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욱 아름다운 가을을 다시 찾고보니 그것은 내가 잃고 말고도 없이 언제나 때가 되면 거기에 와 있었던 것이었다. 반갑게 다시만난 가을은 나에게 살며시 새로운 일깨움을 준 것이다.

과연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관계에서 특히 남녀관계에서 우리는 흔히 사랑의 표시로 서로가 서로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나의 애인, 나의 남편, 내 사람같이 소유개념을 붙일 뿐 아니라 독점권까지도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상 아무리 가까운 부부간이라도 결혼이라는 사회제도적인 형식에서 서로 사랑하고 도우며 존경하며 오래오래 같이 살 것을 약속 한것이지 서로에게 서로를 소유할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소유물을 그 주인이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전히 자기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자발적으로 서로가 서로의 한부분을 포개면서 공동 공용의 생활영역을 만드는 것 뿐이다.

내가 느낀 상실감은 나의 육신의 감각을 통해 느꼈던 그의 생물적 실체와 우리가 같이 구축한 공동의 생활을 잃은데에서 오는 것이지 그와 같은 시공을 채우면서 살아온 엄연한 사실인 그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소유할 수도 없었던 그의 사실적존재는 잃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육신을 뒤집어 쓰고 이 물질적인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죽음이 갑자기 우리를 갈라 놓았을 때 그 당장은 나와 그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생활의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모든 것의 끝장이라고밖에 생각이 들지 못한다. 애초에 소유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잃어버릴 수 없는 것에대한 소중함을 깨달을 여유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의 존재가 계속 나와 같이 있었다는 것을 새로운 발견이나 하듯이 알게 되는 것이다. 가장 확실하게는 아이들의 속에서 또 그를 알고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가 해놓은 일속에 그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가 가을에 떠난 것에 대해서까지도 나는 많이 원망하고 속상해 했다. 하필이면 이 아름다운 계절을 온통 슬픔과 상실로 망쳐놓다니.... 그러나 나는 이제서야 가을에 떠난 그를 고마워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세상에서 있었던 우리의 아름다운 인연을 끝까지 지키기위해 그는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떠나야 했다. 그가 신경질적인 봄바람 속에서, 무더운 장마비 속에서, 또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나를 떠나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이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내 것으로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내가 느끼고 알 수 있는 시공간안에서 그들 나름 그대로 존재함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할 뿐이다. 내가 사랑하는 형제나 친구들, 내가 낳은 자식들 까지도 나름대로의 그들이지 내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은 아름답기에 더욱 짧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뒤로 이어지는 긴겨울은 평화로운 휴식을 약속한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면서도 부활이나 영생에 대해 아직도 확신이 없을 뿐아니라 불경스럽게도 꼭 그래야 할까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다. 이 힘든 세상 그냥 한번 살아 보았으면 족하지 어느 다른 세상에서도 영원히 산다는 것은 너무 힘겨운 일같이 느껴지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로운 생명을 주관하는 것은 절대자의 권한이라는 사실만은 수긍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명이 불멸하다면 내인생의 봄과 여름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가을에 이르렀으니 아름다운 가을에 떠나서 우선은 곧장 겨울의 긴 휴식에 빠져 들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