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계절 중 가을을 가장 짧게 느끼는 것은 아마도 농경 사회의 전통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힘들고 고생스러운 여름의 노역과 더위에서 벗어나 쾌적한 기후에서 땀의 결실을 손으로 만지면서
화려한 자연의 마지막 정염에 홀리는 것도
잠깐, 뒤 이어 곧 닥칠 겨울을 위한 준비를 해야하기 때문에 너무도 마음이 바쁜 것이다.
생업이 계절과 무관한 나도 한창 나이에는 가을이 너무 짧았고 바쁘게 지나가는 것이 늘 급하고 아쉬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가을은 참으로 충만하고 편안한 여유가 있는 계절이 된 것이다. 추석을 전후해서 시작되는 초가을의 높아지는 하늘과 햇과일, 햇곡식으로 느끼는 풍요로움도 좋지만 매일 매일 달라지는 나무들의 행태를 보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온 산을 뒤덮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가을단풍의 기세가 어느날을 정점으로 갑자기 수그러들기 시작하면 나무들은 티끌만한 미련도 없이 나무잎들을 낙엽으로 훌훌 털어 버리는 것이 참으로 경이롭다. 그렇게도 봄과 여름의 거센 비바람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꼳 붙잡고 있던 그 잎새들을 어느 싯점을 기해 그렇게도 맥없이 놓아줄 수가 있는 것일까.
이른 봄부터 싹을 내어 잎을 키우고 꽃과 열매를 맺는 생명의 행진이 한바퀴 진행되는 동안 나무는 욕심을 있는대로 부린다. 어떻게 해서라도 한뼘의 햇볓을 더 받고 한방울의 물이라도 더 올려서 조금이라도 싱싱한 잎과 예쁜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유혹하고 또 아니면 하늘거리는 미풍에까지 아양을 떨어 열매를 맺는데에 온 힘을 다한다. 종족보존을 위한 생명의 본능이 염체없이 무서운 욕심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이 딴 욕심과 무관하여 다른 죄의 원인을 만들지 않기 때문일까.
일단 열매가 익고 그 안에 다음의 새 생명을 잉태하는 씨앗을 완성하고 난 후에는 나무는 너무도 깨끗하게 욕심을 버린다. 허영의 옷을 미련없이 벗어 버리고 단단하고 선명한 나이테를 속으로 보탠다. 의연하게 둥치를 키워가면서 조물주의 뜻에 모든 것을 겸손하게 내마끼는 것이다.
잔가지까지 드러낸 裸木을 바라보면 헐벗음의 스산함을 느끼기 보다는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고 그 이상 필요가 없어져 버린 거추장스러운 속세의 짐을 다 벗어버린 홀가분한 가벼움을 느끼게 되어 편안하다.
여름 동안 무성한 잎새가 경쟁적으로 극성을 부릴 때는 나무들은 그 모습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 잎에 가려 두리뭉수리가 되어 다 그게 그것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잎사귀를 다 털어 버린 늦가을의 나무들은 이제 각 각의 모습으로 섬세한 특징까지 내보이며 분명한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나타낸다. 가식없이 정직한 본래의 모습은 무엇이나 담담하고 잔잔하게 아름답다.
햇빛이 찬란한 늦가을의 나무아래에서 바람 한점 없이도 그냥 뚝뚝 떨어져 내리는
나뭇잎을 맞으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나에게 오랫동안 잊고 있던 장면이 갑자기 떠 올랐다. 듬성듬성 아직달려
있는 예쁜 잎새와 잔가지의 무늬가 꼭 어렸을 때 색색가지 사금파리 조각을 가지고 만들어 햇빛을 향해 돌리며
드려다 보던 요지경속 같이 보였던 것이다. 한쪽 눈에 꼭 붙이고 드려다 보아야 했던 그 작고 좁은 요지경의 속은
정작 환상적으로 넓고도 변화 무쌍하게 아름다웠다.
바싹 마른 잔가지의 끝에도 내일을 기약하는 새 생명의 신비스러운 숨결이 그 요지경 속의 환상적인 그림같이 선명하게 들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