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일본인이시군요." "아니요"

상대방은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도무지 자신이 없다는 결론에 혼자 도달했는지 그제서야 "어느나라에서 오셨지요?" 하고 묻는다. 외국을 여행하면 으례 있는 일이고 특히 유럽쪽을 여행하면 어디서나 여러번 당하는 일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대답을 듣고 난 다음에는 좀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나오는 얘기가 한국전쟁, 한 때 값싸고 좋았던 한국제품, 88올림픽 정도로 알아 주는 척 한다.

간혹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한국인과 중국인이 다르냐?" "한국말이나 글이 따로 있느냐?" 등의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는 질문도 순진한 호기심에서 태연히 묻는다. 한국, 중국, 일본이 각각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를 가졌다는 열 오른 설명을 들으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그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라는 태도로 건성으로 내 설명을 이해하는척 하는 외국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 기분좋은 일은 아니다.

작고 힘없는 나라의 국민일 수록 자기네 나라의 주체성(아이덴티티)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전세계인구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는 큰 덩치때문에 인구 하나로도 힘과 규모를 과시할 수 있는 중국이나 전세계시장에 '메이드 인 재팬'을 온통 깔아 놓을 수 있는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일본을 유럽에서, 아프리카에서 또 다른 어디서나 당연히 동양인의 대표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 두 대표조차도 외국인이 잘못 알아맞추면 기분이 나쁠텐데 우리나라 사람을 수시로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으로 잘못 짚는 것은 약이 오를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당하면 기분나쁠 많은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생각없이 자행하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나라의 알량한 의무교육과정에서 남의 나라, 남의 문화를 배울수 있는 몇개 안되는 과목은 지리나 세계사과목에 불과하다. 각국의 수도나 외우고 각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이나 인물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전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무엇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각 나라에 어떤 인종이 사는지 어떤 언어, 어떤 문화가 있는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더구나 최근 몇년사이에, 특히 구 소련 연방이 와해된 이후, 웬 그렇게 새로운 나라는 많이 생겼는지. 눈만 뜨고 나면 듣지도 못하던 소수민족이 독립을 선언하고 그 전까지 한울타리에 있던 사람들이 각 각 살림을 채렸다.

코 크고 피부가 흰사람이 영어를 써도 그가 미국사람이 아닌 뉴질랜드 사람일 수도 있고 불어를 쓴다면 불란서인이 아닌 벨지움인일 수도, 스페인어를 쓴다면 스페인사람이 아닌 칠레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수정을 받으면서 '그게 다 그거지. 뭘 그렇게 자세히 따져. 다 한 조상일텐데...' 하는 대강주의는 우리나라에서라면 성을 갈으라는 것만큼의 모독이 될 수도 있는 실례이다.

더군다나 작은나라가 그들의 프라이드로 내세우는 예술가나 작가를 잘못아는 날에는 톡톡히 망신을 당한다. 영어로 작품을 쓴 카나다의 작가를 영국작가나 미국작가로 얘기하거나 작품이 독일어라고 오스트리아작가를 독일문학가로 오해하거나 체코의 음악가를 헝거리나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알았다가는 자기네 국보라도 훔쳐가는 도둑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전세계가 개방사회가 되면 될수록 각국가나 민족은 서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고 동등하게 존중되기를 희망한다. 부자나라라고 해서, 또는 군사적 강대국이라고해서 작고 약한 나라를 무시하고 그들의 문화를 깔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이 새로운 루울의 게임을 벌리고 있다. 세계화, 개방화를 이루려면 우리는 작은 나라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공부부터 착실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