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도 나라의 크기나 국력으로 미국과 쌍벽을 이루웠던 수퍼파워 러시아는 이제 눈에 띄게 쇠락의 수렁을 헤매고 있었다. 공산주의의 환상은 간 곳이 없고 정치적 실패와 국가경영관리의 부재로 어려운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이 나라는 쉽게 몸을 추수리지 못하는 공룡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최근의 경제위기는 우리나라의 IMF사태를 무색케 할 정도였다.

모스크바나 쌩뜨 뻬떼스브르그는 외관상 아주 인상적인 아름다운 도시였다. 지평선이 보이는 대평원에 자라잡아 시원한 넓은 도로와 넉넉한 녹지공간에 우거진 숲 때문에 도시 전체가 공원같앴다. 특히 쌩뜨 뻬떼스브르그는 강과 운하가 도심지까지 연결되어 있어 교통도 원활하고 경관이 빼어난 도시였다.

절대왕권 시대에 지어놓은 아름다운 궁성과 교회의 화려함과 혁명이후 전체주의 국가가 세워놓은 기념비적인 건물의 장대함이 어울려서 서구의 어느 도시보다 시각적인 쾌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도로는 엉망으로 패어져 있고 건물들은 모두 후줄근하고 지저분했다. 특히 대학이나 연구소 건물의 내부는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뭐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또 사람들의 지쳐빠진 무표정의 얼굴에서는 오랫동안 폐쇄사회에서 경제난으로 찌들어 살면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힘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것이 쓰여져 있는 듯 했다.

관광수입이 어느 때보다 아쉬운 이 때에도 공항이나 세관직원들의 불친절이나 비합리적인 사무처리는 공산주의 사회의 관료체제에서 체질화 된 듯 했고 상점이나 호텔의 종업원도 서비스정신이나 효율성은 개념조차 모르는 듯 했다.

그런데 다행이도 나의 암울하고 답답한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특권층인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아름다운 궁전이나 교회의 건축물을 공산주의사회에서 반민중적인 표적으로 삼아 때려부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통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바뀐 이 건물들에는 제정러시아의 피터대제, 카타린여제가 전 유럽을 상대로 모은 기막힌 예술품을 국보로 소중하게 간직하였고 이제는 시민 모두가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또한 음악회나 발레공연장에는 그들의 창의성이나 예술성의 표현이 넘쳐있었고 관중의 열기나 관람매너는 서방의 자유로운 어느 부자나라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처럼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민들의 심미적 감성이 단절없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중학교만 졸업한 공장의 직공들도 그들이 쉐익스피어보다 더 위대하다고 믿는 푸쉬킨의 싯귀를 암송하는 것이 보통이고 웬만한 식사값에 해당하는 한두송이의 꽃을 주고 받는 의미를 아는 이 사람들은 유물론적 사회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세계 어느나라 사람들보다도 감성지수가 높은 사람들 같이 보였다.

무엇보다 더욱 나를 감동시킨 것은 그들의 신앙심이었다.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종교가 금지되어 신자들의 종교활동은 박해를 받아 오다가 고르바쵸프의 개방화 이후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어 사람들은 다시 교회에서 정식으로 미사를 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러시아 정교의 미사의식이 많이 다르고 말을 알아 듣지 못했지만 신자들의 뜨거운 정성은 곧 내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젊은이의 수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많은 것도 신기했고 할머니들은 아예 땅바닥에 이마를 조아리며 제대에 경배하며 성화나 성물에 일일이 입을 마추는 모습은 너무도 경건했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신앙심을 다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만도 감사하고 감격해하는 듯 했다.

경직된 사회에서 제도가 시키는대로 기계같이 움직이는 사람들, 겉보기에는 인간성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답답한 이사람들도 한겹 속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것을 귀히 여기고 창의성을 예술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다. 또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신에게 호소하고 의탁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