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에 숙명적인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 난 두 아이들. 우리도 꾸준한 노력으로 가정을 이루었고 치밀한 가족 계획으로 얻은 아이들이었기에 하나 하나를 키우면서 많은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젊은 날의 힘겨운 노력의 결실이 눈에 보이는 단계인 사십대 중반의 건강한 중년부부였던 우리는 별로 불행을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1983 년 10월 9일, 너무나도 우리와는 생소하게 먼 미얀마(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일어난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우리 가정을 가혹하게 강타했다. 국가원수의 외국순방에서 공식 수행원의 신변안전은 상식적으로 가족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특히 우리나라에는 상식이라는 것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일은 너무도 많이 일어 난다.

수 많은 엘리트 고위공직자들을 하루 아침에 잃은 국가적, 또는 사회적인 손실을 우리 가족은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당장 우리 가족의 생존이 달려 있는 가장을 한 순간에 잃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고 받아 드릴 수는 더욱 없는 사실이 현실생활로 우 리에게 닥친 것이다.

두 아들들는 그때 만 스무살과 열 한살, 대학 3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큰 아 이는 그런대로 다 자랐다고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작은 아이는 누가 뭐래도 어린 나 이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내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이들을 혼자서 제대 로 기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었다. 아이들은 양부모가 같이 기르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 된 내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기를 것인가?

어쨋던 그 후로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간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는 것은 새 삼스러운 축복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양 부모가 있는 다른 아이들이 자라는 그 시 간에 아버지를 일찍 잃은 우리 아이들도 똑같이, 아니 어느 면으로는 더 성숙하게 자 란 것이다. 큰 아이는 어느덧 일가를 이루어 가장이 되었고 그렇게도 애처럽던 작은 아이도 올해면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을 잃은 가족이 당하게 되는 어려움은 크겠지만 우리사회의 비정 한 편견은 여자가 혼자서 아이를 기르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생계가 어려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당하는 공통적인 어려움은 가정내에서의 빈자리의 허전함보다는 사회적인 냉대와 차별인 것이다. 부부가 따뜻한 눈길 한번 주고 받지도 않고 아이들이 본받을 만한 모범적인 언행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없이 사는 가정에서도 양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온전가정'의 아이들이다. 반 면 아무리 홀어머니가 반듯하게 살면서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워도 그 아이들 은 '결손가정'의 아이들이다. '후레자식'이라는 나쁜 욕이 곧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 신랑감 다 좋은데 아버지가 없대, 홀어머니가 길렀대...' 아버지 가 없이도 훌륭하게 자란 것에 점수를 주기는커녕 결혼하는데에 큰 결격 사항이 된 다.

힘겹게 살아오면서 나는 내 주위에 많은 여자들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또는 더 어려 운 처지에서 아이들을 잘 기르고 있는 사실을 전보다 더 많이 접하게 되었다. 또 새로 그런 불행을 당하는 많은 어머니들의 한결같은 걱정이 '아이들이 제대로 잘 클까요?' 라는 가장 순수하고 원초적인 질문임을 들을때 모성본능이야말로 여자로서의 가장 강한 동료의식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들의 절실한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답하며 그들을 위로할 수 있 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럼요. 아이들은 어른들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월 이 키워 주는 거예요. 천성이 착한 씨앗이 엄마의 사랑과 희망만 있으면 다 제힘으로 자라는 거예요.'라고. 그리고는 덧부치게 되는 말은 '아버지가 같이 있지 않아도 항상 애들은 부부가 같이 기르게 되는 거예요.' 였다. 논리가 맞지 않은 듯하지만 이는 어쩔수 없는 사실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아도 우리 세 식구는 지금까지 별로 아버지가 안계시다는 생각을 한적이 없다. 언제나 우리는 아버지가 잠깐 출장을 가셔서 집을 비우신 것처럼 얘기하고 또 특히 무슨 결정을 내릴 때에는 '아버지가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지...' 하고 그가 이런 경우에 꼭 했을 얘기를 우리는 기억해 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아이들의 정신적 기틀은 이미 아버지가 다 만들어 주고 떠난 것이었다.

아이들의 진로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예를 들면 군대를 가거나 유학을 갈 때라던가 대학의 전공을 결정할 때나 결혼을 할 때 같은 중대사 뿐아니라 다른 크고 작은 결정을 해야 할 때 그는 항상 우리와 같이 있었고 우리의 결정을 통해 그의 존재가 늘 느껴지곤 했다. 우리 부부는 특별한 가훈을 정하고 애들에게 우리의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애쓰지도 않았지만 아이들과 항상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서 어느틈에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생활신조를 이해하고 생활양식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남편은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70년대와 80년대의 공직자로서 우리 나라의 살길이 우리사회의 의식전환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였다. 민생 문제와 직결된 경제분야에서 우선 국내에서나 대외적으로 개방화와 자율화가 이루워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개인이나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동등한 동반자가 되기 위한 훈련에 국력을 기우려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우리나라의 정책진로를 그 방향으로 이끄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 선각자였다. 따라서 우리 가정에서 먼저 우리 아이들을 우리나라가 미래에 필요로 하는 인력으로 자랄 수 있는 사고의 기틀이 일상생활을 통해 형성되기를 바랐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바란 것은 개방적인 사고방식과 검소한 생활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으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개방적인 사고의 의미는 너무나도 넓고 깊다. 개방적인 사고를 갖은 인간은 이 세상에 다양한 일이 있으며 그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야 하므로 모든 인간은 각자의 가치를 가진 특별한 존재로서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 다양성의 인정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평등성을 이해하고 자신을 비추워 생각하면 자신의 능력이 가장 유용하게 쓰일 이 사회의 어느 부분을 찾아 내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남 보다 좀 더 잘 할 수 있는 일로 사회에서 한 몫을 하면 개인 적으로 자신감과 보람을 느끼게 되며 자존심을 가질 수 있다. 자존심을 가진 사람은 남의 인격이나 일을 존중하게 된다. 우리는 아이들이 일류학교에 꼭 가야 한다거나 일 등을 해야한다는 요구보다는 무슨 일을 하거나 자신의 몫을 완전히 책임지고 하는 것, 또 일을 하면서 남과 조화와 협력으로 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도록 설득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딸이 없는 우리 집에서는 사내애들이 청소나 손님 접대, 차 심부름, 시장보기 같은 가사를 당연히 돕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가사에서 남녀를 가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밖에 나가서도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이 늘 있다는 사실을 일러 주고 하도록 권장했다. 교회에서 어려서는 복사, 대학생이 되어서는 주일 학교 교사 등의 자원봉사를 했으며 공부에 쫓기는 유학생활 중에도 맹인학생을 도와 교과서를 읽어 녹음해 주는등 교내 봉사활동을 계속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선선하게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축복이다.

개방적인 사고의 필요는 시대적인 추세이다. 국경의 담이 낮아지고 국제적인 공동이익 을 모색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각국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점 점 많아 지고 있다. 남의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의 문화를 알려서 공동문화의 기반을 넓히려면 우리가 먼저 열린 생각을 갖고 상호 이해작업에서 선취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개방적인 사고가 인간개인의 평등 사상 뿐 아니라 모든 문화의 평등개념으로까지 연결되어 남의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점을 찾는 노력을 하기를 바란다. 그런 면에서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외국문화에 접할 수 있었던 환경에서 자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각별하게 유의했던 검소한 생활이라는 것도 그 기준이 매우 주관적이 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어느 틈엔가 물질적으로 너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더구나 가난을 지겹게 겪은 우리의 전세대나 우리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쓰라린 경험을 다음세대에 물려 주지 않으려는 일념에서 무분별하게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참을성 없고 무책임하며 자기중심적인 과소비생활을 당연하게 아는 젊은 세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에게 곤궁한 결핍감과 품위 있는 검소한 생활의 다름을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눈에 띄이는 장난감을 다 가져야 하고 당장 먹고 싶은 것은 그 순간에 먹지 못하면 심한 결핍감이나 박탈감을 느낀다면 그 아이는 얼마나 불행할까. 인간에게 욕구충족이 적당히 지연되는 동안이 인내와 노력의 시간이 되고 상상력과 창의력이 발휘되는 계기가 된다. 또 이런 시기야 말로 욕구의 여러가지 종류나 등급을 생각하게 되고 그 가치를 비교하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판단력, 가치의 전환이나 선택의 우선순위까지 터득하는 지혜를 기르게 한다.

물질적인 욕망을 적정선에서 억제할 줄 알고 그 댓가를 정신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도 어려서 부터 훈련시킬 수 있다. 장난감이나 먹을 것을 사고 싶은데 그 돈을 불우 이웃을 돕는데에 내는 것의 의미를 가르치고 특별한 때의 기쁨을 더욱 크게 하기 위해 보통 때는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특별한 음식을 언제나 먹는다면 그것은 그 이상 특별한 것의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린애의 욕구가 너무 충족되어 있어 포만감을 갖게 되면 행위에 대한 적극성이나 창의성이 줄어 든다.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세상에서의 불편을 줄이는 것을 의미하며 모든 소비에 신중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히 환경친화력을 배우게 된다. 자원의 유한성과 고갈성에 대한 인식을 어려서부터 심어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아무 생각없이 식탁에서 음식을 남기거나 남을 생각하지 않고 맛있는 것만 가려 먹는 것 같은 단순한 행위나 아직 더 쓸 수 있는 것을 생각없이 버리는 행위가 결과적으로 낭비나 오염, 사회적인 이기심과 불화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도 이해하기 쉬운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건강한 식사습관이나 절제된 소비습관은 우리 아이들의 유학생활에서 적응력을 높이고 비용을 절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어느 환경에서나 잘 살 수 있는 정신적인 유연성과 신체적인 강인성을 키워 준 것이다.

요즈음의 젊은 부모들은 아이들 교육에 극성스러우리만큼 열심이다. 내 아이는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남들이 하는 것은 덮어 놓고 경쟁적으로 가르친다. 예능, 외국어, 컴퓨터, 웅변까지 온갖 기술을 무작정 습득시키면서 정작 아이들이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 또는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진 사회의 일원으로 조화를 이루며 사는데에 필요한 자질을 생각조차 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부모가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잡다한 기술이나 그 연마를 위한 뒷바라지 보다는 장래 에 그 아이들이 좋아하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배울 수 있는 능력 을 길러 주는 것이다. 그러한 능력은 아이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과 사고방식, 건전한 생활태도와 생활습관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온다고 우리 부부는 믿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에 의미도 모르고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과외공부를 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