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어느 누가 한평생 태평성세를 누리고 산적이 있으랴만은 그 분이 사시다 가신 60년이 좀 넘는
그 기간은 참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더할 수 없는 어려움이 파도같이 계속 덥쳤던 세월이었다.
1910년의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잃는 것으로 시작하여 양대 세계대전으로 어린시절과 청년시절,
광복의 짧은 기쁨과 흥분, 그러나 무서운 혼돈, 그리고 곧 뒤따른 한국전쟁으로 그의 장년은
이어졌다.
경제적으로도 우리 사회가 단군이래 처음으로 구가한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막 시작되려던 70년대가 열리던 때에 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일생을 힘겹게 일만 하시고 수확의 열매는 거의 누리지 못하고 가신
셈이다.그 분은 일찌기 동경제대 사학과를 졸업하시고 구왕실 소속의 李王職 편수관으로 일하신 것을 시작으로 해방후 국립박물관 부관장,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사학과 교수로서 많은 저서를 남기셨고 60년대 초반에 있었던 한일회담에서 문화재 반환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시고 큰 성과를 올리신 분이다. 한국 고대사, 특히 古代 韓日交涉史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셨다.
난세의 지성인, 더구나 다른 분야도 아닌 역사학자로서 또 천성적으로 착하고 남달리 감성적이셨던 아버지의 학자적인 고뇌와 대가족을 거느린 가장, 즉 생활인으로서의 실질적인 어려움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웃는 얼굴, 선선하게 몸을 아끼지 않는 태도, 남다른 부지런함 같은 환하고 기분좋은 것 뿐인것은 그 분의 낙천적이고도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소탈한 생활태도, 또 무엇보다도 그가 지닌 따뜻한 마음씨에 기인한 것이리라.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많아서 짧은 글에 담기는 어렵기 때문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많은 일들이 객관적으로 지금 돌이켜보면 기가 막히게 어려웠던 상황이었는데도 떠오르는 장면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고 따뜻한 기억으로 살아나는 것은 과거의 추억은 그냥 아름다운 법이라 일반적인 통념에서가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버지가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 때문에 우리는 모든 위협에서 철저히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중에 우리 가족에게 있었던 여러가지 일에서 우리 형제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아버지의 인간미를 느끼고 그 가르침의 의미를 깨닫게 되어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다음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일사 후퇴때 우리 식구는 좀 늦게 피란을 떠났다. 맏딸인 내가 12살로 2살짜리 막내까지 10년 사이에 거의 연년생으로 6명의 아이들과 노인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아홉식구의 대가족이었다. 원래 서울 토백이었던 우리 집은 남쪽 어디에도 연고지가 없었고 시골로 유일하게 왕래하던 곳은 지금은 서울의 문턱이 된 용인군 기흥면에 있는 선산과 그곳을 관리하는 묘직이의 묘막뿐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우선 가셔서 우리식구가 기거할 방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는 연말이 다 되어서야 소달구지를 하나 얻어 생활필수품을 골라 싣고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
12월달의 추운 날씨에 용인까지의 100리 길에 피란의 대열은 좁은 국도를 메웠다. 사흘을 걸려 할아버지가 계신 묘막에까지 당도한 우리 식구는 기진 맥진하였다. 원래의 계획은 식구들을 우선 그곳에 데려다 놓고 아버지 혼자라도 부산까지 가시려는 것이었지만 그때 사정으로서는 불가능했고 며칠후 중공군이 그 곳까지 진격해와서 사실상 우리 식구는 전선의 한가군데 놓이게 되었다.
얼마 후 유엔군이 용인지역을 탈환하기에 앞서 우리 작은 마을에 무서운 폭격이 있었고 마을의 반정도가 잿더미로 변했다. 사상자도 많이 났으나 천행으로 우리는 아무런 화를 입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인지 또 우리 식구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아서인지 순간적인 두려움이 지나고 난후에는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신작로를 타고 들이닥치는 어마어마한 유엔군의 행렬을 겁도 없이 구경하러 나가기 까지 했다.
전선을 일단 면한 후의 마을은 더 없이 평화로웠다. 아버지는 민간인의 통행이 허용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피란짐 속에 꾸려가지고 오신 몇권의 책을 꺼내놓고 공부를 시작하셨다. 우리가 아는 아버지는 언제나 책에 파묻혀서 공부하는 모습 뿐이었으므로 그 좁은 피란살이의 단칸방에서 사방에 보따리가 쌓인 가운데에서 촌 농가의 개다리 소반을 놓고라도 책을 붙들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생활이 정상화 된 것같은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었다.
아버지께서 그 전쟁의 와중에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신 것이 우리나라의 고전 [삼국유사]의 색인이었다. 요즈음에는 색인을 만드는 작업은 너무도 쉬운 일이 되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해야하는 끔찍스러운 시간과 노력이 드는 방대한 작업이었으므로 우리의 고전중의 고전인 [삼국유사]조차 색인이 나와 있지 않아 학자들의 연구에 막대한 불편을 주고 있었다. 색인을 만드는 일이란 대부분이 기계적인 작업이므로 본격적인 연구 작업을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에서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학술활동이 었고 또 원래 부지런한 그분의 성격에 이런 경우를 대비하고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냥 허송하지 않으려고 미리 계획을 하신 것일 것이다.
기록카드는 고사하고 변변한 종이도 없었던 그 상황에서 아버지는 우리들이 각자 싸서 짊어지고 온 우리의 사물인 공책 몇권을 공출하도록 설득하셨다. 삼국 유사에 나오는 여러가지 설화에서 의로운 일에 재산을 내어 놓으면 언젠가 부처님이 그 천배 만배로 보상하신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 주셨다. 사실 그 때로서는 우리들에게도 그 공책 몇권은 전 재산이었고 한번 내어 놓으면 다시는 언제 갖게 될줄 모르는 귀한 물건이었으므로 참 아까웠지만 아버지의 간곡한 설득에 당할 재주가 없었다.
훗날에 나도 안 사실이었지만 당시에 학계에서 쓰이던 [삼국유사]는 正德板本, 조선사학회간본, 六堂刊本의 세가지 판본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색인이 없었기 때문에 이 세가지 판본에 대한 공통색인을 그 때 아버지께서 만드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공책장을 화톳장 크기로 잘라서 기록카드로 사용하셨다. 맏딸인 나는 별 할 일도 없고 아버지옆에 그냥 붙어 있는 것이 좋아 항상 무슨 잔심부름이라도 시켜주시는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당시 초등학교 6년생으로 한자도 얼마 모르고 해서 기껏해야 종이를 오리는 일이나 혹시 생기는 파지의 이면을 쓰기 위해 잘못된 면에 가위표를 긋는 일 정도였다. 좀 더 아버지의 인정을 받게 되면서는 아버지가 종이 쪽지에 적어 놓으신 항목에 어머니가 한글로 토를 달아주시면 그걸 보고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는 일까지 승진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이 꼬마 연구조교를 늘 칭찬해 주시고 모르는 한자도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나는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때 이미 식량난이 심해 어린 동생들에게만 점심이 돌아갔고 나는 당당히 어른 취급을 받아 아버지와 같이 점심을 걸르면서 작업에 몰두했다. 땔것도 모자라 방도 추었을텐데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잠시 쉬는 시간에 망연히 바라본 창호지 문의 따뜻한 느낌이었다. 찬란한 겨울 햇볓을 받은 샛하얀 창호지 문의 손잡이 부분에 무늬로 넣은 국화잎새의 예쁜 모양을 쳐다보면서 잎사귀 무늬안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그림들을 상상하고 나는 재미있어 했다. 실제로는 추워서 나가기 싫은 밖앝 세상이 작은 창호지 문을 통해 마냥 밝고, 따뜻하게 느껴졌고 아늑한 방안에서 아버지와 같이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냥 마음이 좋았다.
그러나 내가 어른이 된 후에 더구나 부모가 되었을 때, 그전까지는 나에게는 단순히 아름다운 장면으로 떠오르는 그때의 일이 아버지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을까를 생각하고 가슴이 메어짐을 느낀다. 한창 자라나는 어린 딸에게 점심을 줄 수가 없는 형편에서 아버지는 먹을 것 대신 칭찬을 주시면서 아버지 자신도 그 일에 매달려서 마음을 부치고 의연한 자세로 세월을 벌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 후 민간인의 통행이 자유로워지자 아버지는 우리가 만든 색인을 가지고 부산에 가셨고 피란중에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역사학보]에 그 색인이 게재되었다. 그 서문의 한 구절에서 [... 어떠한 형태로나 결국 민족은 영원히 남을 것이며 우리 민족의 대표적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도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민족의 숙명적 고난을 그 강토안에서 감수함이 그 민족으로 태어난 한 사람으로서 충실한 길이라고 생각한 내가 삼국유사를 몸에 지니고 생사의 노선에 방황한 것도 또한 무의식중의 소치였다.] 라고 아버지는 적으셨다.
아버지가 난세에서 학자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살 수 있었고 우리 형제가 모두 최고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오로지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발휘하여 일생을 뒷바라지하신 어머니의 공로라는 것을 우리 형제 모두는 나이를 먹고 생활인이 되어서 더욱 감사하게 된다. 소달구지 하나에 아홉식구가 살아나가야 할 물건을 싣고 피란길에 오르는데 이불 한채를 더 싣는 대신, 분명히 좀 다투시기는 했겠지만 그 무거운 책짐을 다만 몇개라도 싣게한 어머니의 이해심도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의미도 모르면서 우리민족의 불휴의 고전인 삼국유사의 색인작업에서 꼬마 조교노릇을 했던 내가 지금 문헌정보학과의 교수노릇을 하게 된 것은 재미있는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 여섯남매 중 넷이나 학문과 관계있는 평생직을 갖게 된 것은 우리가 평소에 늘 보고 자란 아버지의 학자다운 생활태도와 인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결과임에는 틀림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