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在益(1938-1983)
서울태생. 경제학자, 경제관료. 경기 중고교, 서울대 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 미국유학: 하와이주립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 (통계학 석사,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부 조사역, 경제기획원 기획국장, 국보위 경과위 위원장,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신봉자, 1970-80년대의 한국경제 정책 입안, 운영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수행. 경제체제 자율화, 개방화,국제화정책의 선구자. 1983년 전 두환대통령 아세안국가 순방에 공식수행원으로 동행중 버마 랑군에서 북한이 획책한 테러사건인 아웅산묘소 폭발에서 순국.

아마도 누가 내 남편 김 재익에 대해 인명사전의 항목을 쓴다면 이 정도로 그의 일생을 압축해서 썼을 것이다. 또 그를 모르던 사람이 어쩌다 김 재익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 보려고 인명사전을 들쳐서 이 항목을 읽어 보고는 '참 아까운 나이에 요절을 했구나, 웬 공부는 이렇게 많이 했지, 학벌이 너무 아깝네... 뭐 경제장관이나 부총리를 지낸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 그 옛날에도 개방화, 국제화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나, 아, 참, 그 때 언젠가 랑군에서 아까운 사람들이 많이 죽었지', 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무리 충격적인 사건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고 아무리 중요한 사람도 일단 없어지면 그 사람이 없이도 세상은 그런대로 여전히 돌아 간다. 또 아무리 기가 막힌 일이라도 자신이 그 일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을 때는 세상에는 그런 일도 있는 것이려니 하다가 곧 잊어버린다.

그렇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많은 경우에 이 망각의 기능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이다. 망각의 반대급부로 받은것이 미래지향성이며 이것이야 말로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 가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어떤 사실이나 사람이 망각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거나 그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란 크고 작은 일의 인과관계와 그것들에 연관된 크고 작은 역할을 한 인간의 존재가 누적되어 이루어 진 것이므로 사실은 영원히 불멸하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김 재익은 公人으로 철두철미 온몸으로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다가 간 사람이니까 역사라는 기념비에 그가 쌓은 벽돌의 크기나 장수가 보통 사람들하고는 좀 다를 것이려니 하는 생각을 내가 갖는 것은 아내로서의 지나친 욕심일까.

그가 홀연히 우리를 떠났을 때 나는 그와의 짧은 인연을 안타까워 했다. 인간의 인연이란 이렇게도 허망하게 끊어지는 것인가가 믿어지지 않았다.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서 아침에 출근한 남편이 저녁에 돌아 오지 않을 것이라거나 출장간 남편이 예정된 날자에 귀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꿈에라도 생각하는 아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 일 이후 어느덧 10년을 넘게 힘겨워 살면서 나는 그와의 인연이 끊어졌다고 믿지 못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실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소멸할 수 없음과 같이 일단 맺어 진 인연은 불멸, 不可分이라는 것을 내가 실제로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물리적인 존재가 내 곁에서 없어진 생활의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 온 것이지 그의 사실적인 존재나 그와의 인연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없어졌다거나 잊혀가고 있다는 생각은 한 순간도 해 본 적이 없다.

인간의 인연은 생각해 볼수록 오묘하다. 과거와 미래의 끝도 없는 시간의 선상에서, 갓이 없는 무한의 공간에서 어떻게 같은 시대에 같은 장소에 태어나서 만나게 되는 것일까. 더구나 가까운 친구, 부모형제, 부부로 태어나게 되는 인연은 절대로 우연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연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원인이고 시작이기 때문이다. 각 인간이 누구와도 생과 사를 같이 할 수 없는 고독하고 독립된 존재라는 냉엄한 사실을 받아 드린다면 영겁의 시간에 비해 찰라같은 일생 동안에 스치듯이 만나 이루어 지는 인연은 신비스럽도록 소중한 것이다.그와 내가 부부로 만나게 된 인연으로 이 세상의 어느 누구와 보다 긴 시간동안 같은 경험을 나누게 되었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본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에 대한 얘기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公人 김 재익에 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많은 글을 썼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나 직책에 비해 참으로 많은 일을 한것으로 기록되었다. 기획국장으로서,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으로서 전무 후무하게 한시대의 경제정책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에는 일치를 보이고 있다. 김 재익 이후 아직까지도 새로운 경제수석들이 임명될 때마다 월간지나 경제신문의 기사에서 그들을 김 재익과 비교하여 다루었고 근래에 와서 경쟁적으로 출간된 5공의 경제정책에 관한 역사적인 회고에서 김 재익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얘기가 나왔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방대하게 지면을 할애한 중앙경제신문의 연재물 '제5공화국의 경제비사' (이 장규저.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1991. 단행본 출판)나 내외경제신문의 '인물경제사' 연재물 중 1994년 1월부터 시작되어 상당히 오래 계속된 김 재익 편, 또 고려대학교 행정문제연구소의 프로젝트로 완성된 [전환시대의 행정가] 라는 단행본에서 백완기 교수가 집필한 '경제자율화의 기수, 김재익' 등을 들 수 있다. 또 영문으로 된 그에 대한 기록은 1991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김 재익 추모 논문집 [경제개발 과정에서의 개방화정책](Liberalization in the Process of Economic Development, edited by Lawrence Krause and Kim Kihwan)의 앞부분에서 '김 재익, 그의 생애와 업적' 이라는 표제로 金 基桓 박사가 집필한 글이 있다. 그러나 한 공인의 진정한 功過는 시간이 좀 더 흐른 후에 역사가 판정 해 주는 것이지 동시대에 같이 살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확한 사실을 기록하여 역사가 내리는 판정에 올바른 자료를 제공하는 일이다.

한 인물의 전기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건이나 이슈들에 대해 그가 어떻게 반응하여 행동하였고 당시 그의 주위에서 같이 일을 했던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던가에 대한 여러가지 에피소드적인 기록이다. 그러므로 전기는 역사책에 기록되는 한 시대의 표면적인 사실의 진행보다는 각 단계의 내면적인 因果關係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한다. 나는 그와 같이 생활하는 동안에도 우리가 아주 나이가 들어 사회생활에서 은퇴하고 난 후에 김 재익에 대한 얘기를 쓰겠다는 생각을 늘 했다. 그것은 우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공직자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도 실제와는 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었다. 내가 옆에서 가까히 본 내 남편과 그의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태도로 일을 하였나에 대해 정확하게 알리고 싶었다. 더구나 그가 나를 떠난 후에 그의 실체와 밀착해 살던 상황에서 벗어나 좀 더 거리를 두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여러 면으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달랐다는 사실을 나는 느끼게 되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쓴 글에서 틀린 점이 많이 눈에 띄었을 때 일일히 그것을 내가 시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 나름대로 그에 대한 사실을 기록하고 싶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개인은 한 시대와 그가 처한 상황의 산물이다. 우리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너무 젊은 나이에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서 중책을 맡게 된것도 그들이 특별히 조숙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6.25라는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제일 많이 희생된 연령계층이 우리보다 10-15년 앞선 윗분들이셨고 그 연령층의 공백을 월반으로 메꾼 계층이 우리세대였던 것이다. 특히 전쟁에서 아버지와 당시 대학 강사와 대학생들이었던 세 형을 잃은 막내둥이 남편은 사회인이 되어 공직자로 일을 하면서 늘 자신이 일찍 중책을 맡아야 하는 것이 돌아가신 형님들의 몫을 하는 것인듯 책임감마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소년가장의 고달픔을 본 것 같아서 애처러운 생각마저 든다. 물론 남편보다 더 젊은 나이에 더 높은 자리까지 간 분들도 있지만 남편의 경우 설흔 여섯에 기획국장, 마흔 하나에 경제수석자리에 오른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 하도록 위험했었다는 생각이 들 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그와 그 동료들이 한 일들이 많은 부분 과거의 습관에 이끌려 해결하지 못했던 것들을 순수한 마음으로 겁없이 과감하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기개의 덕이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지 못했을 상황에서 용감하게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국가의 진로에 새로운 방향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많은 글들을 읽어 보면 그를 만나보지 못한 사람도 대개는 그에 대한 윤곽을 떠 올리게 된다. 경제관료로서 그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자유 경쟁의 철두철미한 신봉자, 학문적으로는 합리적인 이론가, 성격적으로는 외유내강의 조용한 신사, 수도승 같이 자신에게 엄격하지만 남에게는 관대한 사람, 등이 그에게 붙어 다니는 긍정적인 수식어이다. 반면 그를 못마땅하게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 준 이름은 현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이론가, 행정능력이 없는 이상주의자, 사내다운 패기라고는 없는 꽁생원, 순수한 척하면서 정치적 야심이 만만한 모사꾼 등이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 또 인간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장점이 필요 적절하게 활용될 기회가 주어진 경우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김 재익이 가진 인간적인 장점이 1970-80 년대의 우리 나라 경제상황에서 필요한 요소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공직자로서의 면모와 가족과 자연인으로서의 면모를 구분하여 정리해 보려고 한다.

2. 경제관료 김 재익

계획에 없었던 공직생활

어린 시절에 꿈꾸던 일을 어른이 되어 할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더 많은 것에 접하게 되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장래의 희망이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기계를 좋아하여 무엇이나 속을 까발겨 보아야 직성이 풀렸다는 그는 국민학교 시절 제일 즐겨 본 책이 미군부대에서 쓰레기로 나와 충무로 뒷골목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팔던 미국 헌 잡지중에서 '포퓰러 미케닉스'라는 기계에 관한 잡지였다고 한다. 영어를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그림을 보고 알고 또 그 당시 줄줄이 있던 형들과 누나들에게 귀찮게 물어가며 영어까지 깨치면서 열심히 드려다 본 그 잡지들이 그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었다고 했다.

충남 천안에서 한 정거장 남 쪽으로 있는 작은 마을 소정리 그의 시골집에 가서도 언제나 기차역에 나가서 드나 드는 기차의 기관이 움직이는 것을 가까이 보려고 선로에 바짝 붙어 있다가 역원에게 혼나기가 일쑤였지만 어린 시절 그에게는 기계의 움직임 보다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그는 당연히 커서 엔지니어가 되는 것으로 가족들도 자기 자신도 정해 놓고 있었다.

그의 첫번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것은 고등학교 진학 후였다. 그는 적록 色弱으로 이공계열 진학은 수학과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학을 워낙 좋아하니까 수학을 하고 외국에가서 엔지니어링 쪽으로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때 가정형편에 대학을 졸업하면 우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에서 그는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취직시험을 볼수 있는 준비를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않고 검정고시를 보고 고 2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것은 어려운 살림에 한 해라도 빨리 공부를 해야 할 사정 때문이었다. 또 중학교 때부터 좋아 하던 친구 정 근모박사가 한해 먼저 고1에서 대학을 가버린 것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어쨋던 당시 문리대 정치과는 컷트라인이 제일 높은 과였고 고2 때 담임선생님이 적극적으로 권했기에 자신은 별 특별한 생각이 없이 지원한 것이다.

국제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던 그 나이에 외교학과가 새로 생기면서 그쪽으로 옮겨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지만 외무고시를 보고 외교관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국제정치나 국제경제 분야를 공부하여 학자가 되는 것이 그의 두번째의 계획이었다. 학부를 마친 1960년도, 그 때로서는 공개시험으로 얻을 수 있는 직장이란 몇개의 은행이나 언론기관, 중앙정보부 정도였다. 전국 수만명의 대학 졸업생중에서 겨우 수백명 정도만이 자신의 실력으로 직장을 얻을 수 있던 때였다.

한국은행을 택한것은 한나라의 중앙은행이라는 권위에 끌렸다기 보다는 한은 조사부가 당시로서는 유일한 국책연구기관의 역활을 하고 있어 젊은 엘리트들의 집합소였기 때문이었다. 입행시험에서 수석을 했기 때문에 희망대로 조사부의 금융재정과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일생 목표가 구체화되는 것을 보기 시작했다. 그 때로서는 경제문제가 우리사회가 당면한 가장 절실한 문제였고 실제 이슈들을 다루면서 우리사회 전반에 경제학의 새로운 이론을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 때에 우연한 기회로 만나게 된 당시 서강대 교수 남덕우 박사의 영향으로 미국에 유학해서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 분과의 인연은 김 재익이 후에 공직에 발을 드려 놓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 동서문화센터 장학금으로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스텐포드 대학의 박사과정을 공부하던 시절 그는 정말로 자기의 선택에 대해 만족스러워 했다. 명문대학의 석학 교수들과의 만남과 영향은 그에게 새로운 지성의 지평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문은 계량경제학분야로 지도교수는 계량경제학회의 회장까지 지낸 석학 아메미아 교수였다. 그러나 그 때 세계은행에서 파견한 한국 경제고문단의 일원이었던 맥키논 교수가 그를 연구조교로 쓰면서 그 둘은 한국경제발전의 여러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토의하고 같이 연구하게 되었다. 맥키논 교수는 그의 한은 조사부의 경험과 한국경제에 관해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높이 평가 하였다. 그 교수와의 연구는 그가 졸업후 한국경제를 위해 일을 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는데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침 그 동안에 남 덕우 교수가 스텐포드대학에 객원교수 프로그램에 오셔서 일년간 계시면서 그 분과 가진 우리 경제의 문젯점에 대한 많은 토의에서 두사람의 의기투합이 이루어 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3년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서 한은 조사부에 복귀하고 이틀후에 그는 청와대 경제비서실에 차출되었다. 물론 공무원의 신분으로 간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는 그때까지도 공무원으로서의 앞날은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처음 공직에 발을 드려 놓기 시작한 곳이 청와대 비서실이었고 마지막 공직을 마감한 곳도 청와대 비서실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 같다. 당시 남 덕우 박사가 재무부장관으로 계시다가 다음 해에 부총리가 되시면서 그를 기획원에 발탁하셨고 그때 그는 당분간 공직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결심을 그 나름대로 굳히고 있었다.

물론 나는 처음부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우리 집안은 양쪽이 공직과는 무관한 처지였다. 친정아버지인 사학자 이 홍직 교수를 비롯하여 어머니도 오랫동안 교직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 6남매 중 4명이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의 형제들도 수녀님이신 두분의 누님이 성심회에서 운영하는 성심여고나 대학에서 줄곧 일생을 바친 분들이다. 또 우리의 일생계획을 할 때 언제나 가르치는 일이나 연구의 테두리안에서 전문직을 갖는 것을 기정사실로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공직자의 가족이 되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공직에 들어갈 의사를 나에게 비쳤을 때 우리는 그것이 당분간의 시한부라는 조건에서 합의를 본 것이었다.

내가 공무원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봉급이 너무 낮아 생계유지가 어려워 소신껏 일하며 청렴하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상에서 공무원은 으례 부패했다고 보는 것이 싫었다. 또 공직사회의 권위주의가 우리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도 그 이유였다. 나의 지론은 우리 같이 교육투자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해도 사회가 우리에게 베푼 혜택 이상으로 사회에 갚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만 갖고 살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상관이 없을테니까 공직보다는 더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면서 좀 재미있고 여유있게 살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기획원 장관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사실상의 장관자문역으로 임시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을 때 나는 별로 심각게 받아 드리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평생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후에 그가 기획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야 나는 아차,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한번 일을 잡으면 끝을 보는 성격인 남편은 이미 자기가 그 자리에서 주어진 기회에 해 놓고야 말겠다는 몇가지 계획을 확고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가 나를 설득시키기 위해 한 말의 내용은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경제학을 공부하고 나라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우연히 생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기회에 힘껏 일해서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보람이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즈음에 한사람이 일생에 한가지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생에 세가지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우선 공직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니 몇가지 기본적인 개혁을 하여 경제를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 놓고 다음 단계는 이론과 실무의 경험을 가지고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마지막 단계에 가서 자신의 전문지식과 경륜, 국내외의 인간관계를 자본으로 경제정책자문회사를 설립하여 정부나 개인기업을 돕는 일을 하면서 자기도 돈도 벌려면 벌 수도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겠다며 웃었다. 이 세가지 일들을 각 각 십년에서 십오년씩 하다 보면 재미있게 살면서 칠십이 언제 되었나 하고 웃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원래 자기가 할 일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 그의 일생 계획을 들어 보면 별 무리나 과욕이 없어 나는 늘 동의 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다만 순서를 좀 바꾸어 공직이 끝나고 돈을 좀 버는 일을 먼저 해주고 가르치는 일을 나중에 해줄 수 없느냐고 주문했더니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정부에서 오래 몸 담고 있으면 아무래도 큰 이권의 소재나 인간관계를 너무 잘 알게 되는데 정부일을 그만두고 곧 개인기업이나 정부를 상대로 자문을 하면 정경유착 오해의 소지도 생길 수 있으니 안된다. 또 나이가 젊어서 기운이 있을 때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니까 가르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돈걱정을 할때마다 전문직을 가진 맞벌이 부부가 무슨 일을 하건 가난하게 살 수가 없고 돈이란 얼마를 버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라고 했다. 그는 정말로 검소한 생활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살기 때문에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천부적인 공직자의 자질

그가 공직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맞지 않으리라 여겼던 처음 생각이 얼마나 틀린 것이었나를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야말로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삼을수 있는 여러가지 요소를 가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자기의 일에 대한 열정은 소명의식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였다. 또 일을 해나가는 데에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추었을 뿐아니라 일 수행방법에서 여러사람들을 설득시키고 화합하여서 목적달성에 여러사람을 동참시키는 것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그는 나이나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였기 때문에 윗 사람에게 비굴하지 않았고 아랫 사람에게 오만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이거나 개인 하나의 힘이나 지식으로 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여러사람의 각 각 다른 능력과 힘을 합쳐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젊은 사람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나 솟아 나는 힘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북돋아 주었다. 다른 공직자들은 흔히 자기 밑에 있는 젊은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 '내 밑에 있는 사람' 같은 이름으로 얘기 하는데 그는 항상 '우리 젊은 동료'라고 불렀다. 그는 말 한마듸가 사람의 정신상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공무원사회에서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들을 돌봐 주는 것이 어른노릇이며 보스기질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젊은 사람들이라도 같은 전문직에 종사하는 동료로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갑자기 잃은 후 젊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스승을 잃은 것 같다고 진정 슬퍼하면서 "이제 어느 분께 가서 우리가 모르는 것을 여쭈어 보지요" 하던 말이나 그의 여비서가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하는 수위 아저씨나 청소부 아주머니들이 자기들에게까지 늘 공손하게 인사를 해주시던 김수석님같은 분이 또 어디 계시겠느냐고 슬퍼해요"라고 말했을 때 나도 더욱 아까움과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늘 젊은 공무원들에게 교수가 학생들에게 충고하듯이 하는 얘기가 있었다.앞으로는 승진이 옛날 같이 빠를 수가 없으니까 어떤 직급에 너무 매달리지 않고 계속 공부해서 자신의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외국에도 가서 견문을 넓히고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는 인재로 자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승진에 너무 집착하여 공부할 기회를 마다하고 승진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무리 똑똑한 인재라도 관료 체제에 눌리고 경직된 계급때문에 무시당하면서 오랜 세월을 지나다 보면 그들이 소신을 펴고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직급에 도달할 때쯤엔 이미 관료주의의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정신적으로 소진상태가 되어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는 젊은 사람들을 이런 현실에서 보호하며 아끼고 키워 주어야 한다고 했다. 전문직으로서의 직업관료, 테크노크렛의 자부심이 민주정치의 튼튼한 틀을 만든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체면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봉급이나 신분을 공무원에게 보장해 주는 것은 어느 정권에서나 기본과제라고 주장했다.

그의 공직생활이 다른사람들과 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전문가 의식도 있었지만 그가 공무원생활을 시작하던 위치가 많은 사람들이 공직을 마감할 수 있는 직위였기 때문에 그는 승진은 전혀 염두에 없이 일을 할수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늘 공무원 아내들이 인사이동 때마다 마음을 졸이고 승진에서 탈락되면 마음이 상해하는 것을 주위에서 보고 남편에게 내가 그런 마음을 쓰지 않고 살게 해주는 것이 고맙다고 했다. 그는 어느 직급에서든 자기가 하는 일이 언제나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하는 것을 보면 옆에서 보는 사람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신명이 나 있었다.

정확히 따져 그는 11년 2개월의 공직생활을 했다. 지나간 세월로는 짧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대로 참으로 많은 일을 겪은 기간이었다. 그가 거친 직책이 몇가지가 되지만 경제기획원의 기획국장으로 5년 가까이, 청와대 경제수석의 자리에서 3년 이상 있었던 것이 그가 가장 보람있게 생각했던 직책이었다. 앞에 언급했던대로 남 덕우 장관이 김 재익을 기획원에 데려다 놓으셨지만 당시 공무원법에 의하면 그에게 줄 수 있는 직책은 별정직 밖에 없었다. 남장관께서 기획국장직을 별정직도 할 수 있도록 공무원법을 개정한 후에 김재익을 임명하셨기 때문에 爲人設官이라고 하여 내부의 반발도 있었고 매스콤의 비난이 심해서 우리는 매우 송구스러웠다. 나는 더구나 그런 물의를 감수하고 그가 공직을 택할 필요가 있을까를 의문했지만 그는 남장관을 모시고 그 직책에서 근본적인 몇가지의 경제개혁이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사기가 높아 있었다.

그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보다 새로운 지식의 흡수량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러 오는 외국의 언론인, 학자나 기업가들에게도 그의 독서량이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새로 나오는 책들을 보내 주었다. 그들은 또 그가 그 책을 꼭 읽고 다음에 만나면 그 내용을 토의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많은 양의 지식을 입력하고 분석하는 힘은 그의 남다른 점이었다. 그는 거시경제정책에서 앞으로 10년 20년의 앞날에 대비하는한 올바른 방향설정은 국내외 경제의 복합적인 데이터와 연관관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 원칙논자 였다.

그는 시장경제의 신봉자였으므로 그가 기획국장으로 4차와 5차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면서도 계획경제나 통제경제는 후진국이나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발전도상에 있는 나라일수록 원칙적인 경제논리가 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당장 어려운 일을 모면하기 위한 편법이나 전시효과를 노리는 통계의 조작은 하루 빨리 근절되어야 한다고 했다. 정치적인 문제에서 독립된 경제정책이 이루워지도록 통치권자의 강력한 후원과 이해로 계획경제에서 자율적인 시장경제체제로 하루 속히 전환되어야 한다고 했다. 70년대 초반에 그는 앞으로 5개년 계획은 많아야 서너개 더 할까, 20년 이내에 경제기획원의 역활이 많이 변경, 축소되고 기획국장자리도 없어지게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며 자기가 아주 이 자리를 없애고 나올까하는 농담까지 했다. 나는 공직에 오래 있지 않겠다던 그의 약속이 틀리다고 항의하면서 또 자기가 그렇게 그 자리를 오래 깔고 앉아 있으면 후배들 승진은 어떻게 될거냐고 물었다. 그는 한다는 소리가 "한 10년이나 15년 후에 우리 똘똘한 과장 중에 하나가 기획원장관이 되고 내가 여기 버티고 앉아 있으면 참 일하기 편할꺼 아냐, 내가 하자는 대로 할테니까" 하며 속편한 소리를 하고 웃는 것이었다.

先見之明의 어려움

그가 직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을 내가 자세히 알 도리가 없다. 특히 그는 사무실에서의 기분 언짢은 일들을 집에 와서 화풀이하거나 짜증을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또 집중력이 강해서인지 아무리 고민이 많아도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베게에 머리를 얹으면 그 순간 깊은 잠에 빠지는 이상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법이 없으니 옆사람은 마음이 편했다. 그렇지만 집에 와서 밤늦게까지 여러사람들과 업무전화를 길게 하거나 혼자 많은 생각을 하며 메모지를 많이 쓰는 때는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을 나는 알아 채렸다.

그는 보통사람들보다 항상 한걸음 앞의 시대를 보는듯 했다. 先見之明이란 개인의 문제에서 거취를 결정하는 경우에는 참으로 좋은 것이지만 여러사람을 설득시켜 한 나라의 장래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참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20여년동안 그가 예견한 여러가지의 사실들이 놀라웁게도 적시에 현실화 한 것들을 생각하면 나도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물론 어떤 것은 웬만한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는 맞출 수 있었겠지만 많은 것들은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통한 분석에 의한 것이므로 그 당시의 보통 사람들은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고 들을 생각도 안한 것들이었다.

4차 5개년 계획에 통신개혁안을 포함시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필사적인 것이었다. 정경유착으로 얽히고 설킨 통신분야의 후진성을 극복하지 않으면 80년대 90년대의 정보화사회를 대비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사실을 여러사람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그때 어느 엔지니어보다 통신시스템에 대한 기술과 시설비용, 효과분석에 관한 문헌을 많이 읽었다. 나중에 한 파티에서 그 분야의 외국 회사 엔지니어출신 사장이 나에게 그가 기계공학을 전공했느냐고 물은 일이 있었다. 내가 그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통신계획 때문에 외국의 기술 시찰을 갔을 때마다 그쪽 회사의 공장장이나 기술이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사실 경제기획관료가 그렇게 기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이 그들에게도 신기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의 통신개혁에 대한 집념의 근저에는 70년대 말의 우리나라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주류를 이룬 제조업이나 기능인력 해외건설수출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확실한 예견이 깔려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지속되려면 고급인력의 부가가치가 높은 서비스업으로의 전환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모든 서비스업을 위한 사회간접자본의 기본인 통신시설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로서는 통신에 관심이 있으면 전화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미 정보화사회나 지식산업, 정보산업 같은 쪽에 상당히 앞 선 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와 통신의 불가분성을 이미 선진국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에 전자산업과 통신산업을 하나로 묶어 추진해야 한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통신의 후진성이 어느 특정기업의 독점에 주 요인이 있었고 그 아성이 너무도 견고했을 뿐아니라 관계부처 공무원의 상당수가 같은 이권에 얽힌 공동운명체였기 때문에 아무도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낡은 기술의 교환기를 계속 써가지고는 도저히 계속 늘어나는 보통 전화의 수요조차 따라갈 수가 없었고 더구나 곧 닥쳐 올 데이터 통신이나 여러가지 자동화 전산통신망 계획은 생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시기에 전자교환기로의 전환계획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권을 가진 측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아무도 거론을 하지 않고 정부와 편안한 관계에서 이익을 챙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미국 박사 젊은 경제관료가 감히 도전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일단 결심이 서면 같이 일할 사람을 열심히 찾는다. 누구에게나 쫓아가서 자기의 계획을 설명하고 의기투합이 되어 같이 일할 사람이라고 믿으면 스승으로 모신다. 내 기억으로는 그때 새로 알게 된 경 상현박사와 성 기수박사, 박 찬모 박사등이 초창기부터 통신과 전자산업의 기술적인 문제에서 절대적인 후원을 해주신 분들로 그가 늘 감사하게 생각하던 분들이다. 4차 5개년 계획에 통신개혁을 포함시키고 그때로서는 첨단기술의 전자 교환기로의 전환이 결정되어 특정기업의 독점이 마침내 깨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일의 진전은 그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간 후 오 명박사를 만나 결정적으로 이뤄졌다. 그는 오 명박사가 체신부차관으로 가시게 된날 저녁 때 집에 와서 나를 보고 "인제 우리나라 통신문제는 해결될 길이 열렸어. 이제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드디어 보이네" 하면서 좋아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힘이 들 때에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좌절을 표현하지 않지만 일이 잘 될 때는 어린애 같이 좋아하고 주위사람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내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통신개혁은 그가 외부에서 들어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상하좌우의 인간관계나 공무원의 타성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일이 진행되는 동안 가까운 친구들이 걱정을 많이 해 주었다. 통신사업이 워낙에 큰 이권이므로 기득권자들이 그냥 당할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을 통한 회유작전을 쓰다가 통하지 않으니까 별별 음해를 다 했다. 나중에는 그 재벌구룹의 회장단회의에서 '김 재익을 조지기로' 결의를 했다는 깡패들이나 쓰는 말이 오갔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한동안 '김재익은 미국국적을 가진 CIA 요원' 이라던가 '통신사업에 동참시킬 회사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 등의 루머가 우리 귀에까지 들어 왔다.또 그들과 합작을 하고 있던 독일의 회사에서는 독일 대사를 통해 압력을 넣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워낙 자신의 소신이 확고하면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성격이고 그때 남 덕우장관과 장 덕진 차관께서 그를 잘 보호해 주신 덕분으로 개의치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통신개혁안이 확정되어 일단락 지어진 후에 그 회사측에서 회장이 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 때 그는 이 개혁이 성공하면 통신사업의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지니까 동참자의 몫이라도 현재의 독점보다 더 큰 사업이 될것이라고 그 회사의 동참을 격려했다. 나는 그 얘기를 나중에 듣고 "당신은 밸도 없는 사람이우" 하고 화를 냈다. 그는 "나중에 가서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해 부끄러움을 알게 되겠지" 하며 나를 보고 웃었다. 독일 대사도 그에게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했다. 얼마후 어떤 모임에서 그 대사가 나를 만나자 옆으로 끌고 가더니 나에게도 다시 사과하면서 "나도 국익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사람이라 여러번 무리스러운 요구를 하게 되었지만 당신 남편과 얘기를 해 볼수록 한국에 이런 공무원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내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이 들었다"고 말해 주어 남편이 한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제일 호된 벌일테니까.

그에 대한 모함은 그 후에도 중요한 정책을 추진하려 할 때마다 있었다. 제일 악성 루머는 그가 청와대에 있을 때 실명제를 추진하는 중에 극성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공직을 택한 사명감에 대한 댓가가 이런 것인가 하는 회의와 반발이 크게 일어났다. 더구나 우리 가정이나 나에 대한 허무맹랑하고 저질스러운 말들이 얘깃거리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태연하게 중요한 일일 수록 어려운 것이고 이 사회의 힘센 사람들이 반발을 심하게 하는 것일 수록 꼭 이루어야 하는 과제라고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는 나쁜 언어를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자기를 음해하는 특정인들에게까지 '그 분들, 그 사람'이라는 호칭을 썼고 제일 심한 욕이래야 '답답한 인간', '못난 놈'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친한 친구들이 오히려 그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야, 이놈아, 네가 뭐 그렇게 고고하다고 그 나쁜놈들에게 존칭을 쓰니, 너도 좀 욕도 하고 화도 내라, 우리가 답답해서 너를 보면 미치겠다" 하는 말을 하곤 했다. 그는 그저 빙긋이 웃고 "개가 사람을 문다고 사람이 개를 마주 물 수 있나, 이게 다 후진사회에서 일해야 하는 시대적 운명이지."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나도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속이 있는 사람인가 하고 짜증을 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만일 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주위사람들을 들볶고 마음이 불편해 했다면 내가 얼마나 더 힘이 들었을까 하고 그를 고마워하게 된다.

공직의 댓가란 그런 것인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너무도 큰 댓가를 요구했다. 10.26 사태, 12.12사태, 광주사태 등으로 이어지면서 5공으로 넘어가는 79-80년 시기의 정치적 혼란에서 국내 경제는 악화일로였고 국제수지 적자는 위험수위에 있었다. 그 당시만해도 외국의 차관이 우리경제의 중요한 젖줄이었는데 국내경제 실적이 부진하고 정치적 안정전망이 흐릴 때 아무도 돈을 꾸어 주려하지 않았다. 1978부터 기획원에서 추진한 안정화정책안은 당시 신 현확 부총리의 주도로 당시 기획차관보였던 강 경식의원과 김 재익팀의 노력이었지만 그때 까지의 정책에서 백팔십도의 방향전환 요구하는 획기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통치권자나 관료사회에서 받아드려지지 못했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주장은 앞에서 일한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비난하거나 그들의 공로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국제사회의 변화나 전과는 달라진 국내의 상황에서 이전의 정책이 효력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변화에 대한 상황판단을 옳게 하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그 때까지의 성공적인 업적이 계속 이어지기 위한 작전을 말한다.

그 당시의 경제사정이 웬만했었거나 또는 그가 경제관료가 아니라서 그런 국가적인 위기상황에 대해 속속드리 알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서 일을 했었다면 아마도 그는 나의 끈질긴 간청에 못 이겨 공무원을 고만두고 경제 학자의 생활로 돌아 갔을 것이 확실하다. 정부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부터 그는 그의 개혁적인 정책건의가 받아드려지는 한도 안에서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가 1980년 여름에 국보위 경제과학 분과위원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기획원에 사표를 낸 직후였다.

김 재악과 전 두환대통령과의 만남은 그냥 '숙명적'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일가 친척을 아무리 넓게 둘러 봐도 군부과 관계를 가진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국민의 의무인 군복무에서 졸병이나 높아야 위관급인 군의관, 법무관을 지난 젊은이들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신군부의 핵심세력과의 연결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국보위 참여는 너무 의외였고 당시 상황에서는 그 직책을 제의받았다기 보다는 명령받았다는 편이 옳았다. 그가 그 것을 받아드린 것은 전 두환 당시 상임위원장을 여러번 만나보고 그가 구상하고 있던 경제개혁안에 전폭적인 지원을 얻을 수 있고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군부에 대한 지식층의 반발과 냉소, 5공 초창기부터 계속 정리되지 않았던 정권의 정통성 시비의 논란은 경제문제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이중적으로 얹힌 짐이었다.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를 아끼는 주위사람들의 의견은 양립되어 타협할 줄을 몰랐다. 그의 인간성에 신뢰를 가질 만한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중에서도 그가 출세를 위해 정권에 야합하는 사람으로 질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이해하고 그가 정부를 그때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물론 그와 뜻을 같이 하였던 동료 공무원들이나 당시 경제상황에서 진정으로 위기감을 느끼는 학계의 친구들이었다. 누구나 무슨 일을 할때 주위 사람들이 다 잘 한다고 박수치기만 바라지는 않는다. 정당한 반대의견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연히 남을 헐뜯고 방해하려는 인간들이 득세하는 권력의 핵심에서는 참으로 그의 처신은 어렵고 마음이 불편한 것이었다.

나는 당사자가 아니지만 중간에서 정말 마음이 상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여러사람이 모인 데에서 성격이 송곳같은 사람이 나에게 "김 재익이는 일을 한다는 핑계로 김 일성이 밑에 가서도 충성할 인간이 아니냐?"고 따졌다. 나는 그 때 떨리던 가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김 재익과 그의 집안, 특히 그의 어머니에게는 '김 일성'이나 '빨갱이'는 입에 올리기조차 터부시 되어 있는 단어였다. 그의 집안은 6.25의 가장 큰 피해자 중의 하나였다. 나는 그 날 집에 가서 너무 약이 오르고 남편에게 지워진 운명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가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그 얘기를 해주었더니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있더니 "만약에 내가 김 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 하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때 한문 스터디 구룹에서 孟子를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보면서 맹자에 나오는 柳 下惠라는 인물을 생각했다. 유 하혜는 伯 夷와 항상 같이 언급되는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백 이는 악과는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 편벽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섬기지 않고 친구가 훌륭하지 못하면 사귀지를 않는 고고한 인물이었다. 은나라의 폭군 紂王을 피해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만 먹고 굶어 죽은 청렴한 사람이었다. 반면 유 하혜는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 대범한 인물로서 시대가 그를 필요로 하면 아무리 못난 임금이라도 섬기며 직책의 높낮이에 관심이 없이 어느 자리에서도 자기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나라를 구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소신대로 일하다가 버려져도 원망을 하는 법이 없고 곤궁한 처지에서도 근심을 하지 않고 무식한 사람들이나 악인들의 가운데에서도 태연자약하게 자신의 태도를 지켰다. 아무리 흐려진 세상에서도 자신은 흐려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고 화합하고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맹자는 이 두 사람을 같이 높이 평가하지만 극단을 고집하는 것이 중용의 도는 아니라고 했다. 맹자는 뒷부분에서 다시 유 하혜를 온화한 태도를 지키며 仁義 끝까지 버리지 않는 聖之和者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의 신임도

그가 그때 공직을 떠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그가 맡고 있던 외국에 대한 정책설명과 홍보의 역활이 너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기획국장의 직무에는 공식적으로 포함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지금과는 달리 당시 정부내에서 대외적인 정책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모자랐기 때문에 그는 업무중 많은 시간을 외국인사들을 만나는 데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때의 상황이 외국차관이나 외국기업 합자유치등의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때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계획이나 실적, 전망예측에 대한 분석을 우리나라와 경제관계를 갖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원하고 있었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일개 국장이었지만 국제적으로는 '한국정부의 경제전문가 김 재익'(Dr. Kim, the government economist)으로 불리웠고 외국 대사관이나 상공회의소, 언론기관에서 너무도 그를 찾는 일이 많았다. 각국 대사들이 본국에서 고위층의 귀빈이 한국을 방문하면 한국의 경제 문제 브리핑을 위해 반드시 그를 원했다. 만찬에 초대할 때는 외교적인 의전을 무시하고 우리를 바로 주빈옆에 앉혔다. 나는 그때마다 그가 손님들의 계속되는 질문에 답하느라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어떤 때는 눈치껏 내가 한 화제가 끝나는 틈을 잡아서 일부러 다른 화제를 꺼내 나하고 얘기하는 동안 남편이 뭘 좀 먹을 시간을 만들곤 했다.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하면 저녁마다 화려한 만찬에서 공직자들이 좋은 음식이나 즐기는 것으로 알겠지만 참으로 힘드는 업무의 연장이었다.

남편이 공직에 있는 동안 겪은 미국대사는 슈나이더, 글라이스틴, 워커등이었는데 그들은 한나같이 몇번 우리를 같이 만나 친해지면 남편을 초대해야 하는데 사무실에서 선약이 있어 불가능 해지는 경우 내게 집으로 전화를 하고 정말 중요한 선약이 아니면 당신이 좀 남편에게 얘기해서 데리고 올 수 없느냐고 스스럼없는 부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떤 때는 나에게 전화를 하고 "사무실에서 닥터 김은 못온다고 했지만 오늘 저녁은 경제문제 얘기는 필요없는 모임이니 당신 혼자라도 올 수 없어요? 사실 파티에서 닥터 김보다 당신이 재미는 더 있으니까" 하는 농담도 했다. 나는 혼자서 그런 자리에 갈 때마다 남편하고 같이 가서 그가 밥도 제대로 못먹고 닥달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보지 않아도 되니까 오히려 마음 편했고 또 여러 분야의 재미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국보위시절과 5공 초기에 특히 주한외국기업인들은 바짝 얼어 있었다. 군사정권이란 일반적으로 배타적인 국수주의나 폐쇄주의의 성향이 짙은 법이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외국세력을 몰아 내고 외국기업을 몰수하는 예도 많았기 때문에 신군부의 태도, 특히 경제정책에 대해 예측을 하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국보위 시절 이런 것을 감지한 남편은 전 두환 당시 상임위원장에게 외국기업인을 한번 소집해서 안심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고 그런 모임을 가졌다. 그 모임의 효과는 당시 주한 기업인 사회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얼마후 미국상공회의소주최 모임에서 우리도 있는 자리였는데 당시 의장 (크라우스로 기억됨)이 인사말에서 공공연하게 전 두환의장과의 만남에서 그 옆에 서 있던 김 재익을 보는 순간 모든 기업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아무리 군사정권이라도 김 재익같은 이코노미스트를 기용했다면 계속 한국에서 외국기업이 동반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고 말하자 우뢰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와 나도 놀랬다. 그만큼 외국사람들에게는 그가 합리적인 개방주의자로 정평이 나 있었던 것이다. 위기상황에서 한사람의 힘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두환 대통령과의 관계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의 첫해는 옆에서 보기에 딱할 정도로 24시간 일을 하였다. 세간에서 그를 전 두환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라는 이름을 부친 것을 그는 아주 불편하게 생각했었다. 그는 원래 자기 얘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으므로 나에게도 대통령이 그에게 가졌던 신뢰도에 대해 얘기하는 일이 없었다. '대통령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라니 '대통령이 김 재익에게 무슨 말을 했느니, 김 재익이가 대통령에게 무슨 제의를 했느니'하고 신문 가십이나 시중에서 다니는 얘기를 들으면 "나하고 윗분하고 한 얘기를 누가 들었을리도 없는 일이고 나나 그 분이 딴사람에게 얘기 한일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들을 만들어 내지?" 하고 웃거나 신문을 보다가 혼자서 "소설 잘 쓰고 있네" 하는 정도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한번은 내가 혼자서 미국대사 만찬에 가게 되었는데 대사가 나를 그 날의 주빈에게 '한국경제계에서 가장 힘이 센 김 재익박사 부인'이라고 웃으며 소개해서 내가 당황해 하니까 그 손님이 얼른 "그렇게 전압이 높은 사람과 가까이 살려면 감전위험이 많아 조심되지요?, 어때요?" 하고 농담을 했다. 나는 집에 와서 그얘기를 하면서 "당신 맨날 쩔쩔매고 고생만 하는데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왜 하지? 그런데 당신이 정말로 무슨 힘이 있기는 있는거유?" 하고 물으니 그는 웃으며 "글쎄,... 내가 딱 한가지 힘이 있지. 그건 내가 힘을 쓰지 않을 수 있는 힘, 힘세지 않아도 되는 힘... " 하고 애매모호한 말을 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에게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당신의 겸손의 극이 오만의 극과 만나는 때도 있구려, 조심해요." 하고 뻔히 쳐다보았더니 그도 마주 보고 허허 웃었다.

대통령의 신임이란 그가 마음 먹은 일을 할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것으로 족한 것이지 그것을 내세워 다른 생각을 가질 그가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그를 잃고 난후에 우리 가족을 만난 자리에서 전 대통령은 사고가 난 후에 기가 막힌 것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 분 자신도 모르게 제일 먼저 김 재익은 어찌되었는가를 묻게 되어 당황했다고 하시면서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정말로 국보적인 존재셨다"고 안타까워 하셨다. 또 몇 년 후 아이들과 인사차 연희동을 찾아 뵈었을 때 얘기 끝에 내가 탔던 택시 기사의 얘기가 재미있어 전해 드린 적이 있었다. 그 택시 기사는 6공에 들어 와서 다시 경제사정이 전같지 않다고 걱정을 하면서 "사실 전대통령이 뭐니 뭐니해도 물가는 확실히 잡았었죠. 그 때는 오래간만에 생활의 안정이 느껴졌거던요" 하였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그런데요, 민주사회니까 한번 대통령하신 분이라도 장관을 못할 것도 없지 않아요? 그분을 모셔다가 기획원장관을 시키면 어떨까요?" 하고 웃었다. 내 얘기를 들으신 전대통령은 웃으면서 "김 재익이가 다시 와서 비서실장을 해 주면이야 내가 할 수있지" 하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분이 진심으로 김 재익의 공을 인정해 주시는 것이 참으로 흐믓했다.

청와대 시절 초기에는 식구들이 그의 얼굴을 보려면 9시 뉴스 화면의 구석을 잘 찾아야 했다. 주중에 식구들과의 저녁식사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초기의 업무파악을 위해 주말에도 대통령이 지방순시를 자주 가셨기 때문에 경제수석은 언제나 동반해야 했다. 대통령의 거취는 일급비밀이므로 아침에 사무실에 갈 때도 모른다. 사무실에는 항상 간단한 여행가방을 준비해 놓고 저녁시간이 다 되어 비서가 "지방출장이 있으셔서 오늘 저녁에는 댁에 못들어 가십니다" 하면 9시 뉴스에서야 그가 그날 저녁 가 있는 곳을 알게 되는 것이다. 어쩌다 쉬게 되는 주말에도 산더미같은 읽을 거리를 가지고 와서 종일 드려다 보니까 어머님이 너무 딱해서 "일요일은 좀 쉬려므나"하고 걱정을 하시면 "어머니, 이건 일이 아니고 재미로 쉬면서 보는 거예요" 하고 깨알 같은 통계표를 들고도 안심을 시켜드렸다. 아이들도 어떤 때는 "아버지, 좀 슬슬하시고 우리 세대가 할 일도 좀 남겨주시지요" 하고 우스갯 소리를 하면 그는 "우리 세대가 하는 일은 그저 우리 국민이 겨우 먹고 사는 문제해결을 하려는 것이란다. 사람이란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되면 더 많은 복잡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란다. 너의들이 할 일이 더 많고 더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어려운 일일수록 보람있는 것이니 할 일 없을 걱정이란 아예하지 말고 열심히 준비해라"고 말해 주곤 했다.

그는 누가 봐도 튼튼한 체질이 못 되었다.그러나 그 격무에 시달리고도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는 강단을 보였다. 자신의 체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아서 가능한 한 몸에 좋지 않다는 것은 안하는 것, 몸에 좋다는 것 중에서 자기가 할수 있는 것은 꼭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항상 어머니가 마흔넷의 나이로 열한번 째의 아이로 낳으신 자신이 어머니의 마지막 진까지 뽑았다고 안타까워했다. 연로하신 어머니 앞에서 병들어 눕는 것이 큰 불효이기 때문에 그는 늘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효심을 어떻게 하늘이 몰라 주고 그 어머니 앞에서 세상을 떠나야 하는 불효를 저지르게 했는지 나는 지금도 운명 앞에 힘을 잃지 않을 수 없다.

간단 명료한 그의 경제철학

나는 경제이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학교 다닐 때도 경제학 강의라고는 정식으로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는 나에게 항상 경제학이란 기본적인 생활상식이며 단순한 논리의 적용이라고 하면서 경제문제를 설명할 때는 경제문제와 관계 없어 보이는 생활의 실례에 적용시켜 설명해 보이곤 했다. 나는 그의 설명이 조금만 복잡해지면 "됐어요, 집안에 경제학자 하나 있으면 됐지"하고 듣기를 거절하면 그는 끝까지 끈기 있게 설명하곤 했다. 그는 경제이론처럼 명쾌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을 나에게 이해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정부의 정책을 국민이 이해하고 따라주기를 기대하겠느냐고 했다. 그는 항상 경제정책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동참시키지 않으면 성공을 거둘 수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제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옆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교육대상 국민이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교육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5공 초기에 공영방송에서 시작한 대국민 경제교육에 그는 많은 관심을 쏟았고 대학 시절부터 뜻이 맞는 친구였던 이 계익 KBS 해설위원 (전 교통부 장관)이 주관을 했기 때문에 늘 협의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 마침 우리는 한 동네에 살고 있었으므로 밤 늦게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도 서로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그 프로그램의 비공식 모니터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는 저녁에 늦는 날이 많으므로 내가 꼭 듣고 얘기해주어야 했다. 초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으니 내가 그와 20여년을 살면서 매일 듣는 것이 그 얘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좀 더 관심을 갖고 좋은 가정교사가 있을 때 열심히 배울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가 추진한 여러가지 경제정책의 실제적인 내용은 경제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나는 설명할 필요도 능력도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철학이나 일상 생활에서 늘 듣게 되는 얘기를 통해 그가 이루려는 목표가 무엇이며 방향은 어떠한가를 이해하는 것은 경제학 이론을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는 정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주장한 정책노선을 안정화, 개방화, 자율화의 세가지로 흔히 요약했다. 그리고 하나 하나에 대한 해석을 따로 따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항상 세가지 정책이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전체를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또 용어의 의미를 언론이 왜곡하는 것을 우려했다. 즉 안정화정책이 경제성장정책과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고 인플레라는 성장의 알맹이를 갉아 먹는 병충해를 제거한 건강한 경제성장이라는 것, 국제간의 교역이란 서로의 이해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우리의 경제가 해외연관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해외의존도는 교역을 하는 모든 나라가 다 마찬가지라고 했다.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경제가 해외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건강하지 않고 불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실제로 '해외의존도'라는 용어 대신 '해외연관도'라는 용어를 쓰기를 원했다. 또 통화량억제나 물가억제라는 말도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았다. 인플레의 요인을 제거하고 물가인상 요인을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 원인은 놔두고 최종 말단점에서 억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무역이란 국제간의 사고 파는 거래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수출을 더욱 많이 하려면 남의 물건도 사주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비교우위가 낮은 물건은 외국에서 싼 값으로 사다가 쓰는 것이 일반근로자들의 생계비를 나추어 임금인상요구를 완화할 수 있으므로 노동력의 생산성이 국제 경제력을 갖는다는 논리를 이해시키려고 그는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때만 해도 수출은 부국정책이고 수입은 망국정책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므로 수입개방이 그때까지 이룩한 경제성장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믿는 보수주의 관료들이나 학자들은 그의 개방주장을 몰아 세웠다.

당시의 재야세력의 정책비난의 쟁점의 하나가 외채망국론이었다. 사실상 외채의 액수 자체만을 볼 때 눈덩이 같이 해마다 불어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율이나 총생산에 대한 외채의 비율이나 상환능력이 개선되고 있기 때문에 망국논까지 들먹이는 것은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었다. 자원이나 자본이 없는 나라에서 인력과 기술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우리나라 수출정책의 근본이므로 단순한 기능의 제조업에서 시작했지만 우리가 부지런히 고도의 기술을 습득하여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기술산업이나 지식산업으로의 전환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상환능력의 한도내에서 외국의 자본으로 시설과 기술에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미 그 때 중국이 얼마 안가서 제조업에서 우리를 따라잡을 것을 예상하고 늘 '한국을 추격하는 22억개의 손'을 경고하였다. 우리가 얼른 제 때에 제조업을 내어 주고 다음 단계로 가지 않으면 앉아서 빼앗긴다고 하였다. 그는 90년대에 가면 국제간의 문제가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것보다 경제적인 이해관계 위주로 바뀌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다는 것을 믿었다. 그가 물론 그 당시에 소련의 붕괴나 독일의 통일을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진영의 큰 나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드리고 개방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국제정치에 대한 감각이나 분석력이 남달리 정확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 그는 인간의 본성이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의 건강한 경쟁력이 기본이 되는 자본주의 개방시장 원리에 더 잘 맞는다는 것, 인간 개성의 계발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철저히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박 정희 대통령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분의 권력의 말로나 권력유지의 과정에서 여러가지 정치적으로 유감스러운 일을 안타깝게 생각했지만 그 분의 경제입국의 비젼과 강력한 의지가 우리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그 시작의 발동을 걸어 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구호품이나 원조자금 대상국으로 또는 전쟁고아의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가난한 후진국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를 인정받는 수출국으로 바꾸어 놓은 공로는 대단한 것이다. 그는 5공 때 누구나 박대통령의 정치적인 과오나 경제적으로 잘못된 것만 얘기할 때 공공연하게 그 분이 우리나라 근대화의 아버지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대통령의 대외지향성 추구가 사실상 우리나라의 국제화의 시작이었다. '세계속의 한국'이라는 3공의 캐취 프레이즈야말로 국제화정책의 현판식이라고 그는 자주 말했다. 그 때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고 균형된 국제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그것은 배워 나가기 위한 교육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박 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도 그는 남다른 시각으로 해석을 하였다. 그는 우리나라의 농업과 축산업은 자연조건 때문에 아무리 잘하려 해도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국민에게 이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늘 했다. 그는 농민들의 이농현상은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국가에서 그것을 장려하고 농민들의 직업전환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더 이상 농업국가가 아니라는 점, 우리나라가 앞으로 경제 선진국 노릇을 하려면 국제시장을 상대로 제품이나 서비스를 파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하고 국민의 대부분이 주종 산업분야에서 일을 하여야 하므로 농업종사 인구는 계속 줄어야 한다고 했다. 선진국중 국민을 먹여 살리고도 남아 농산물을 수출을 하는 나라도 인구의 3-5프로의 인구만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인데 당시 우리나라는 30프로 가까운 인구가 매달리고도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없을 정도로 경쟁력이 약하다. 더구나 농업 보조를 위한 추곡매수때문에 생기게 되는 재정적자는 인플레의 주 원인이 되어 전 국민의 경제안정을 해칠 뿐 아니라 국제가격보다 훨씬 높은 식료품비를 지불해야 하는 70-80프로의 비농업 인구의 생활비를 높임으로 다른 업종의 생산원가를 높여 국제경쟁력을 더욱 잃게 한다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인 개혁도 중요하지만 새마을 공장이 농촌의 부업 차원이 아닌 농민들이 직업전환의 수단으로서 본래의 뜻이 살아야 한다고 했다. 농민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오는 이농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생산성이 높은 직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농업종사 인구의 수를 줄이는 결과를 이루려는 것이 본래 정책의 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농촌출신이기 때문에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을 부강하게 한다고 말은 했지만 농업을 주산업으로 계속 키운다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새마을 공장이 건강한 중소기업으로 발전하도록 정책이 이어지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또 식량자급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흔히 쓰는 '식량의 무기화'라는 용어는 그가 제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말이었다. 그는 그 말이 갖는 허구를 이런 논리로 설명했다. 국가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의 원리가 철저하게 작용하는 것이 세계시장이다. 식량을 상품으로 팔아야 살아 갈 수 있는 많은 나라들이 어떠한 이유로도 우리나라가 필요한 식품을 돈을 가지고 사겠다고 하는데 팔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만약에 한 두 나라가 정치적인 제스춰로 한국에 대해 식량불매운동을 일으킨다고 한들 다른 나라들이 얼마든지 팔려고 할 것이다. 또 아주 만약에 식량을 팔아야 하는 모든 나라들이 단합을 해서 한국에는 식량을 팔지 않겠다는 사태에 이를 만큼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따돌림을 받고 고립된다면 그 이전에 수출이고 뭐고 다 끝장이 나는 것이다. 그 지경으로 나라가 국제사회에서 국가 대접을 못 받게 된다면 그런 정권이 어떻게 유지가 될 수 있겠느냐? 그는 '식량의 무기화'라는 비현실적인 구호로 국민을 오도하는 사람들의 무책임성을 개탄했다. 개인이 남에게 인격적인 사람대접을 못 받으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것과 똑같이 한 국가도 국제사회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면 국가 노릇을 못하는 것이다. 한 나라가 물질적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런 폐쇄적인 국수주의가 민족주의나 애국심으로 둔갑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의 미래지향적인 개방정신이 저해 당하게 되는 것을 그는 심히 우려했다.

그러므로 그는 개방화와 자율화를 통한 합리적인 경제효율성 추구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높이고 따라서 내실이 있는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는 것이 안정화이므로 모두가 하나의 일이라고 했다. 또 그는 경제적인 개방화가 철저히 이루어지면 정치적인 민주화는 곧 따라 온다고 믿었다. 즉 국민이 자유롭게 바깥 세상을 돌아 다니면서 국제적인 견문을 넓히고 자유로운 정보의 접근이 보장된다면 정치적으로 민주화가 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아무리 군사정권이지만 폐쇄정책을 쓰지 못하면 독재란 불가능한 것이다. 국제관계의 연관성이 높은 나라일수록 국제사회의 체면이나 이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국제사회에서 국가로서 행세하려면 민주주의의 이름에 맞는 인권보장도 점차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의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의 국가, 특히 북한의 폐쇄정책이 경제적인 파탄으로 이어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정치적으로 비인도적인 개인숭배나 개성말살로 독재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곧 들어날 것이라고 했다.

나는 8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의 10년 동안 일어난 여러가지의 변화를 보면서 참으로 그의 말이 거의 대부분 맞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중국의 개방이나 정치적 국경을 초월한 경제 공동체 블록화 현상, 우르과이 라운드등의 새로운 무역질서등에서 그동안 그가 있었다면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이러한 국제적인 새로운 바람에 좀 더 유리하게 편승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한 정권이 또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항상 전임 통치권자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앞 사람이 어떤 시대적인 제약조건이나 정보나 지식의 부족으로 하지 못했거나 올바로 하지 못한 일을 후임자가 계속적으로 고쳐나가고 조정해 나가면서 개선을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민생문제가 계속되는 한 경제문제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개량이나 수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므로 요새 와서 문민정부가 이름하는 '신한국'의 '신경제정책'에서 국제화,개방화가 독자적이고 새로운 것같이 떠드는 것에 대해서 나는 매우 거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전임자의 공로를 인정하는 마음

나는 공직자로서의 그의 생활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기 때문에 그가 같이 일하던 동료나 모시던 윗 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한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으므로 누구에게서나 자기가 같이 일하기에 필요한 장점을 찾고 그것을 귀히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지 단점은 말하지 않는다. 그도 인간이므로 자기와 뜻이 맞는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미워하지 않았다. 언론이나 세간에서 김 재익이 누구하고 마음이 맞지 않느니, 누구와 불화관계라거나 또 김 재익을 누가 미워한다거나 제거하려고 한다니 할 때도 그는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 나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의 얘기만 나에게 했고 또 사람들의 좋은 점만 얘기했다. 그러므로 나는 그와 같이 일한 동료들이 얼마나 훌륭한 공직자들인지 또 얼마나 소신껏 열심히 일했는지에 대해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이 각 시대, 각 분야에서 열심히 일한 공직자들의 사심없는 노력의 결과이며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국민들은 인정하는데에 좀 더 너그러웠으면 한다.

기획원에 모시던 윗분들 중에서는 특히 남 덕우, 신 현확, 신 병현 부총리를 존경해서 그 분들의 얘기를 나에게 많이 해 주었다. 남총리는 그가 공직에 발을 드려놓게 된 계기를 마련하신 분이였으므로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선배 또 학자로서 존경했다. 신 현확 총리는 그 분의 경제전반에 대한 통찰력으로 안정화로의 방향전환의 필요성을 제 때에 이해하신 것, 그분의 일상적인 정치적 추진력이 김 재익이 늘 감탄하던 점이었다. 또 신 병현 부총리의 학자적인 원칙론은 참으로 그와 통했기 때문에 경의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들에 대해서도 그는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나라의 최고 통치권자의 자리란 애국심이 없이 할 수 없는 자리이므로 누구라도 일단 그 자리에 서면 어찌 사리사욕을 생각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는 이 승만 대통령은 건국대통령으로 박 정희 대통령은 근대화 대통령, 전 두환대통령은 개방화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기면 그 다음에는 누가 되던 그 분은 민주화 대통령의 이름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의 민도가 발전하는데에 따라 그것에 걸맞는 정권이나 통치자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지려면 근대화, 개방화가 그 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전 두환대통령이 그가 가장 가까히 모신 분이므로 그 분이 정통성 시비를 보상하고도 남을 업적은 무엇보다도 개방화에 의한 경제발전으로 국민의 생활수준과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한차원 올리는 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나라를 위해 일하신 분들의 공로를 좀 관대하게 인정하는 부드러운 사회분위기가 빨리 정착되도록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 순한 사람이었다.

1983년 10월 초 그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 며칠전 홍콩에서 열린 경제인들의 국제회의에서 기조연설을 하였는데 그 제목이 '한국경제의 전망은 밝다'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긍정적인 비젼을 제시하고 갔다. 그가 열심히 추진했지만 좌절되었던 여러가지 일이 그 후로 많이 이루워졌고 지금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개방화, 국제화의 의식의 변화, 경제구조개선을 위한 제도적 개혁인 실명제의 실시등 그가 같이 일하면서 소중하게 생각하던 동료들이 계속하고 있고, 특히 그가 아끼던 '젊은 동료'들이 지금은 모두 중책을 맡아 일을 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무슨 일이든지 한 사람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또 한편 한사람 한 사람은 각 각 아주 중요한 힘을 발휘한다.

그를 추모하는 마음

그가 타계한 후 그를 아끼는 친구들은 그의 흔적을 구체적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그 때 같이 돌아 가신 분들 중에서 학계에 계셨던 몇 분들은 가족과 친지들이 미간의 논문을 모아 책을 발간하였다. 우리 친구분들중에도 그런 것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신 분이 계셨다. 그러나 나는 좀 생각이 달랐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학계에 종사한 일이 없었고 그가 많은 글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정책입안자로서의 정책자료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연설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경제학의 이론전개나 연구를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학자적 자질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널리 활용이 되지도 못하는 책이 형식적으로 출판되어 어느 구석에 쳐박혀 있게 될 것이 나는 싫었다. 나는 오히려 그의 사상을 주제로 해서 전문경제학자들이 본격적인 경제학 책을 써서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출판될 수 없을까를 타진하였다. 또 가능하면 국내에서만 읽히는 것보다는 국제적으로 활용되도록 국제적인 명성이 있는 경제학자들이 영어로 쓰고 출판도 권위있는 미국의 대학출판사에서 했으면 했다.

감사하게도 나의 소원은 김 재익과 뜻을 같이 하시는 金 基桓박사(전 KDI 원장)와 당시 워싱턴의 부루킹연구소에 계시던 경제학자 로렌스 크라우스박사가 이루어 주셨다. 두분은 김 재익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세계적인 경제학자 중에서 개방정책을 주장하여 김 재익과 뜻을 같이 하는 분들을 선정하여 개방정책을 통한 경제발전을 주제로 각 분야별로 기고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Laurence Krause, Anne Krueger, G. Ranis, G. Johnson, R. McKinon 등의 다섯분의 미국학자와 홍 원탁, 박 영철 두분의 한국 경제학자, 중국 학자 썬 첸, 스웨덴의 A. Lindbeck, 독일의 J.B. Donges, 파키스탄의 P. Hassan 등이 참여한 그야말로 국제적인 시도였다.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출판부에서 기꺼히 출판을 하기로 했다. 물론 시간은 지루하리 만치 오래 걸려 1991년 7월에야 우리는 '경제개발과정에서의 개방화정책'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김 재익 추모 논문집의 출판기념회를 할 수 있었다. 출판기념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는데 남 덕우박사께서 감격적인 인사말을 해 주셨고 크라우스박사도 일생동안의 학자생활에서 이 책만큼 여러사람의 애정이 담긴 작품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하셨다. 워낙에 필진이 훌륭하기 때문에 경제개발 분야의 대학원 수준의 교재로도 많이 활용되는 착실한 이론서적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우의 김 우중 회장께서 필자들을 위해 연구비를 희사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했다.

또 한가지의 김 재익 추모사업이 생각지도 않게 이루어 졌다. 그의 최종 모교인 스텐포드 대학에서 경제학관을 신축하면서 국제적인 졸업생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하여 김 재익을 스텐포드의 '훌륭한 졸업생'으로 선정하고 그의 이름을 붙힌 세미나 룸을 하나 만들기로 합의했다는 총장의 편지가 1992년 내게 온 것이다. 물론 대학의 이런 결정은 모금운동의 일환으로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졸업생 중에서 이름을 학교 건물에 남기게 되는 것은 참으로 큰 영예이다. 스텐포드 한국동창회는 경제학과 졸업생만도 서상목 박사(보사부 장관) 홍석현박사(중앙일보 사장) 김윤형 박사( 한국 외국어 대학 교수)등 우리 사회의 중진이 많다. 이분들 중심으로 동창회에서 성의표시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삼성의 이 건희 회장께서 '사심없이 일만 하다가 가신 공직자'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싶다는 말씀과 함께 그곳 현지 법인을 통해 스텐포드에 기부금을 내어 주셨다. 너무도 감사했다. 미국의 일류대학에 한국사람의 이름이 붙은 장소가 생기고 또 그것에 대해 한국기업이 기부를 했다는 사실은 십년전만 해도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 동안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나 국제적인 위상이 얼마나 달라진 것인가를 생각하면 정말로 감격스럽다.

지난 5월 경제학관이 완공되어 총장의 초대로 개관식에 참석하였다. 전체건물 개관식은 총장주최로 성대하고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건물이름은 기부금을 제일 많이 낸 랠프 랜도우 라는 분의 이름이 붙혀졌고 그안의 교실, 강당, 라운지, 세미나실의 이름도 다 의미있는 분들의 이름을 붙였다. 우리방 입구에는 Kim Jae-ik Memorial Conference Room 이라는 패말이 붙어 있었다. 나는 이런 영광스러운 감격을 좀 더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어서 세미나 룸 오프닝 리셉션을 따로 조촐하게 가졌다. 마침 전 기획원 동료셨던 진 념 전 동자부 장관이 초빙교수로 스텐포드에 계셔서 같이 초청인이 되어 주셨다. 또 그날 김 재익의 경기동창들이 정성스럽게 선물해 준 이 만익 화백이 그린 그의 초상화를 그 방에 걸었다. 파티는 대 성황을 이루어 세미나실에 꽉차고 복도에까지 사람들이 넘쳤다. 학장, 학과장,현직 교수들과 한국 학생들, 그 근처의 유지들 중에 우리의 친지들이 많이 오셨다. 특히 노인이 다 되신 김 재익의 옛날 은사들도 모두 오셔서 그분들이 간직하고 계신 김 재익의 추억과 덕담을 많이 해주셔서 마음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 아주 흐믓했다. 정말로 화기애애하고 좋은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공직자로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을 감사하고 황송하게 생각한다. 우리나라같이 남의 말을 좋게 하는 것에 인색한 풍토에서 그는 참으로 인복이 많은 사람이다. 나는 이런 추모행사를 할 때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그는 자기를 위해 사람들이 애를 쓰는 것을 안쓰럽고 거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아마도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다.

3. 선량한 인간, 김 재익

어머님의 사랑과 가르치심

우리집 거실 벽에는 平生無私라는 네 글자의 현판이 하나 붙어 있다. 얼마 전에 타계하신 원주의 재야운동가이며 서예가이신 장 일순 선생님이 김 재익의 비문의 글씨를 써주실 때 같이 나에게 만들어 주신 것이다. 장 선생님은 김 재익을 만나신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절친한 친구 한 기호, 강 연심 부부를 통해 우리의 얘기를 많이 알고 계신 분이었다. 나는 항상 그 현판을 보면서 그분이 참으로 김 재익의 생활을 간결하게 표현하신 것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길지 않은 일생에서 가장 활동적이었던 공직생활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사적인 생활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공직자로서의 생활이 그의 몸과 정신을 다 매어 놓고 있었기 때문에 김 재익의 인간성은 그의 일에서 보여준 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품은 그의 어머니의 절대적인 사랑의 결과라는 것은 그의 모자 관계를 아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그 분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있는 絶對善의 한계에 닿으신 분이라고 생각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시어머님은 19세기 말에 태어 나셔서 구한말과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시면서 그 사회적인 혼란이 개인에게 미치는 모든 고통을 직접 몸으로 받으시면서도 한국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끝까지 지키신 강인한 한국의 모성상이다.

나는 남편의 형제들이 시어머님의 총명과 지혜를 물려 받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신식 교육이라고는 학교 문턱에도 가신 적이 없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이시는 능력이 탁월하시어 아시는 것도 많고 타고 난 총명과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신 분이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일가친척의 전화번호가 필요하면 찾을 생각을 하지 않고 어머니께 여쭈어 보는게 보통이었다. 80이 넘으셔서야 "요새는 내 기억력이 옛날만 못하다"고 부끄러운듯 미안해 하시던 겸손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분의 사고방식의 유연성이나 개방성은 어느 젊은이 못지 않았다. 그 옛날에 딸들을 차별없이 교육시켜 세분을 모두 서울대학에, 미국유학까지 가도록 하신 것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진취성이었다. 첫째와 셋째 누님은 화학, 심리학에 각 각 박사학위까지 받으셨고 첫째와 둘째 누님이 성심회 수녀가 되셔 카톨릭 교육사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계시다.이런 어머니와 누님들 밑에서 성장한 김 재익은 여자가 남자보다 무능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차별의식은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우리 아이들에게도 "우리집에서야 여성해방이 반세기는 먼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 못난 남자들이 많아 여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고생이 많단다"하며 우리사회의 성차별을 아이들에게 얘기해 주었다.

작년에 큰 아이가 유학중 학교에서 만난 여학생과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는 결심을 알려 왔을 때 며칠간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그에게 보낸 축복의 편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너의 아버지가 할머니께 어떤 아들이었나를 너는 생활에서 보고 자랐고 나도 할머니가 어떤 시어머니셨던가를 지금도 살아 가면서 다시금 엄숙하게 배우고 있단다. 우리가 그렇게 훌륭한 모자관계를, 고부관계를 보고 배운 사람들이 아니겠니. 그것은 다른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던 산 교훈이며 우리는 정말로 복이 많아서 그런 좋은 교육의 기회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단다. 그러므로 너에게는 다른 당부가 필요없고 나 또한 다른 새로운 각오나 결심이 필요없는 듯하다. 그저 할머니와 아버지를 정성껏 따라 하기만 하면 되지 않겠니? 그러면 네 처나 앞으로 생길 아이들도 다 저절로 살면서 배우게 되겠지".

나는 어려움과 아픔이 점철된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막내아들 가족인 우리와 노년을 평화로이 보내시게 된 것으로 보상받으시는 것이려니 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정성껏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일생이 '현대사를 산 한국여자의 일생'으로서 자세히 기록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편에게 늘 내가 일찍 은퇴해서 글을 쓰게 되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겠다고 했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나는 지금도 알 도리가 없는 하나님은 그 착하디 착한 분에게 한조각의 햇볕같던 마지막 평화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88세의 작고 가냘픈 노인은 막내아들을 앞세우시고 말 그대로 피를 토하시고 곧 뒤따라 가셨다. 나는 그 이후 어머니의 생각을 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쓴다는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졌다.

나이를 먹어가며 내자신이나 내 주위 사람들, 가깝게는 우리 시어머니의 삶을 드려다 보면 소설이란 진짜 삶을 희석해 놓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젊어서 실제로 있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을 보고 '소설같은 얘기'라고 한 것은 그만큼 세상을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대부분의 인생실화는 너무도 진해서 그대로는 사람들이 소화를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물을 타 놓은것이 바로 소설이다.

나와 남편과의 얘기는 동화에서 시작해서 소설로 이어진다. 그만큼 우리는 어려서 만나 같이 자라 왔기 때문이다. 그와의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서는 나는 그를 공인으로 공개할 수 있지만 아직 우리의 내면적 관계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말하기가 싫다. 그것은 누구나 일기장을 혼자서만 숨겨 놓고 읽고 싶어 하는 수집음 같은 것이겠지만 너무 사적인 것이라 그와 나 이외의 누구와도 선뜻 나눌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또 우리의 관계는 과거지사로 끝나서 사진틀 안에 끼워 놓은 그림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대하소설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무슨 일이나 그에게 의논하게 된다. 아이들에게도 항상 "아버지께 여쭈어 보면 무어라고 하실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도 동의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계속 일깨워 주는 내 인생의 스승이다. 그와 같이 사는 동안에도 내가 물어 보는 질문에 대부분의 해답을 그는 주었고 나를 떠난 후에도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를 도와 주고 있다. 그의 영혼은 지극히 자유로워 매인곳이나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늘 편안할 수 있었다. 일을 추진할 때 보이는 집요한 애착을 그는 일을 끝내고 나면 깨끗이 버리고 자기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또 아무리 집요하게 추진시키던 일도 정말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되면 칼로 자르듯이 단념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나와 약속한대로 자기가 하려고 했던 몇 가지의 일을 끝내면 공직의 미련을 깨끗이 버리고 다음 단계의 인생계획을 실행했으리라고 확신한다.

'다름'을 포용하는 그의 종교관

그의 종교관이 반드시 기독교적인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우리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천주교라는 제도적인 틀을 통해서 믿고 있기에 다른 틀을 통해서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다른 종교인의 생각도 존중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그가 물론 다른 교리에 대해 공부할 시간이 없었지만 그의 종교관에서도 다분히 그의 합리성이나 개방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가족간에도 기본적인 신뢰와 사랑만 있으면 그외의 지엽적인 것에서는 서로 간섭을 하지 않는 자율성을 중시했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는 시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두말 없이 유아영세를 받게 했다. 그러나 유학중에 태어난 둘째 아이에 대해서는 그는 아무리 자식이라도 종교같이 개인적인 결정을 부모가 할 수 없다고 다음에 커서 자신이 선택하도록 하자고 해서 유아영세를 보류했다. 집안에 수녀님이 두분이나 계시고 혼배미사에서 자녀를 천주교 교리안에서 기를 것을 서약했으면서도 그는 아이의 개인적인 결정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카톨릭에서 성모께 바치는 묵주의 9일 기도를 할 때마다 그는 나보다 훨씬 많은 덕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힘드려 간구해도 얻기 어려운 여러가지의 덕성, 즉 '하느님 대전에서 겸손한 덕', '애주 애인하는 덕,' '가난한 생활을 즐겨하는 덕', '정결한 마음가짐의 덕', '하느님께 순명하는 덕'을 그는 태어 날 때 이미 가지고 있었던 듯 싶기 때문이다. 겸손한 성품이나 정이 많은 따뜻한 마음이나 정결한 마음은 나도 참 좋아했지만 가난한 생활을 즐겨하는 그의 마음 때문에 젊어서는 내가 불평을 많이 했다.

그는 기독교의 성인 중에서 성 프란체스코를 특히 좋하하고 늘 그의 평화의 기도를 노래로 흥얼거리고 다녔다. 그 성인은 그야말로 安貧樂道의 동양사상에 걸맞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가 나중에 작은 아이의 세례명을 프란체스코로 하자고 했을 때 나는 "당신이나 가난한 생활을 좋아하지 우리는 다 별로니까 나중에 애가 어른된 다음에 그 이름을 싫어 할꺼야"하고 반대했다. 그는 결핍의 의미와 검소한 생활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늘 애를 썼다.

검소하고 정갈한 일상생활

그가 기획국장으로 있을 때 하루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큰아이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이죠?" 하고 물었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은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는 일이란다"하고 대답하자 그 애는 대뜸 "그럼 우리집이 좀 더 잘 살아야겠네요. 그래야 사람들이 아버지가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것 아니예요" 하고 웃었다. 그는 애를 데리고 심각하게 얘기를 시작했다. "너 태어나서 한번이라도 배가 고픈데 집에 먹을 것이 없었던 일이 있니?" "아니요". "너 그럼 한번이라도 추워서 잠을 잘 수 없었던 때가 있니?" "아니요". "아픈데 병원에 돈이 없어 못 간적은?" "학교에 수업료 제 때에 못내거나 공부하고 싶은 책을 못 산적은?" 아이는 번번히 고개를 저었다. "얘, 우리집 참 잘 사는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기본적인 것을 다 못하고 있단다. 이 이상 뭐가 더 필요하니?" 아이는 할 말은 없지만 납득은 안 된 모양이었다. "그렇긴 해도...'

집안 살림에 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도 그는 그런 식으로 대한다. 돈이란 사업을 하는데 필요하지 먹고 사는데 뭐 큰 돈이 필요하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나는 그가 매일 드려다 보는 통계표에서 다루는 돈의 단위가 하도 커서 돈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건 우리가 생활하는데에 필요한 것과 같은 종류의 돈이 아니지. 그냥 숫자일 뿐이야." 하였다. 그래서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큰 돈은 얼만데?" 하니까 그는 한 이백만원쯤이라고 해서 내가 그 이유를 묻자 그의 대답이 웃으웠다."사람은 항상 자기의 월급의 두배 쯤 되는 돈이면 아주 큰 돈이니까... 좀 기다려, 내가 할 일 좀 해놓고 더 큰 돈을 벌어서 당신 다 줄께..." 아마 그랬겠지, 자기는 돈이 필요없는 사람이니까.

결벽증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씻기를 좋아해서 다른 것은 다 검소하면서 물은 남의 몇배를 쓴다고 내가 불평을 하곤 했다. 그에게서는 늘 깨끗한 비누 냄새가 났다. 유행이 지난 옷도 개의치 않았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이는 그가 헌칠하게 큰 키로 외국인들과 같은 눈높이로 서서 논리 정연하고 유창하게 얘기하는 것을 옆에서 볼 때마다 내 가슴은 사랑과 자랑으로 가득함을 느꼈다. 또 그의 신변은 언제나 깨끗이 정리 되어 있었다. 불필요한 가구나 물건은 아예 드려놓지도 못하게 해서 우리집에 와 본 사람들이 "왜 같은 평수인데 이 집은 이렇게 넓으냐" 고 묻곤했다. 그는 우리 가옥구조에서 온돌방의 다용도성을 아주 좋아 해서 침대는 쓰지 못하게 했다. 하나의 공간이 침실, 식당, 공부방, 응접실이 다 되니 얼마나 좋은거냐고 하면서. 또한 우리 방에서 항상 제일 큰 벽은 자기 몫으로 하여 아무 그림도 걸지 못하게 하고 빈 공간으로 놔 두기를 원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할 때는 그 빈 벽을 응시하면서 온돌방 한가운데 큰대자로 편안히 누워 있었다. 내가 늘 '면벽좌선'은 들어 보았지만 그렇게 편하게 참선이 되느냐고 놀렸다.

그의 특유의 '마음편함'은 따지고 보면 그의 정신적 운신의 폭이 남달리 넓은데에 있는 것이다. 그는 화려한 연회에서의 식도락적인 진귀한 음식의 맛이나 최고의 포도주향을 즐길줄 알면서 한편으로는 지저분한 시골의 장바닥에서 질펀하게 앉아서 장국밥 한그릇을 진정 맛있게 비우는 사람이다. 그의 친구들도 각 분야에서 각양 각색이었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하고도 얘기를 잘 하고 또 배울 점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잃었을 때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던 그의 친구 송 복교수(연세대)는 내게 보내준 편지에서 한 사흘을 혼자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다니다가 그의 청정한 모습이 떠올라서 옷깃을 여미고 정신을 가다듬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비문을 만들어 보내 주셨다. 살아서는/ 향기를 멀리 멀리 풍기고/ 맑음을 날로날로 더해가던 그대/ 이제 하늘 나라에서도 그 씨를 뿌려가리라/ 아, 그러나/ 그대는 너무 총명했기에 우리는 그대가 아쉽고/ 그대는 너무나 다정했기에 그대가 그립고/ 그대는 너무나 인자했기에 그대를 잊을 수가 없노라.

친구들은 우리가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 시대에 캠퍼스내에서 공공연하게 연애를 했다고 놀리지만 나는 그에게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그는 나의 대학생활 첫날부터 말없이 따라 다니면서 등록, 수강신청등 필요한 때에 도와 주고 내 시간표를 꼬박 꼬박 챙겨 시간이 맞으면 교실앞에서 기다렸다가 책가방도 들어 주고, 도서관에 일찍 가서 자리도 맡아 주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는데에 정성을 드렸다. 결혼후에도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에 남의 남편처럼 선물을 사주었거나 세상에서 흔히 생각하듯 고급공직자의 아내로 특별한 호강을 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내 생일 달에는 잊지 않고 내 친정 어머님께 나를 낳아 길러 주신 데에 대한 감사로 조촐한 돈봉투를 드렸고, 또 일상 생활에서 내가 하는 말을 재미있다고 잘 들어 주고, 나와 같이 하는 일을 무엇이나 즐거워 하며 같이 웃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다음 생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는 김 광섭의 싯귀를 장난스럽게 외는, 그런 사람에게 무슨 다른 사랑의 확인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4. 글을 맺으며.

그가 없는 내 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는 너무도 당연히 내 옆에 내남편으로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얼마나 그것이 소중한 것인가를 느끼지 못하고 산다. 또 그것을 갑자기 잃게 되면 우리를 덮쳐 버리는 상실감으로 올바른 사고능력을 잃기 때문에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고 귀하게 느낄 생각을 못하고, 오로지 '없음'에 대해서만 안타까워 한다. 그를 잃고 난 후 몇년간은 항상 무엇으로부터인지는 모르는 탈출만 생각하고 살았다. 아니, 살았다기보다 시간을 흘려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 10년만 목석같이, 기계같이 버티고 지내고 나면 작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겠지. 그럼 나는 의무를 다 하는 것이니까... 나는 그가 없는 내 생활에서 생명의 존재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생명은 목석안에, 기계속에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살아 움직이는 힘 자체이다. 생명의 동적인 속성은 그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같은 일을 절대 반복하지 않는 계속 새롭고 경의로운 진행만을 허용한다. 생명의 시작, 진행단계, 소멸을 일으키는 힘은 생명자체에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는 것이지 생명을 담고 있는 그릇인 인간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생명도 인간의 소유가 아니므로 그 진행의 어느 단계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생명도 내 소유가 아닌데 하물며 다른 개체인 다른 사람을 내 소유같이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된다고 생각한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또 내안에 있는 생명을 거부하면서 생명력을 펄펄 뿜어 내며 자라야 하는 우리 아이들을 기르는 의무를 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돌같이 차디 차고 굳은 가슴을 가지고 이 따뜻한 피가 흐르는 아이들의 생활을 어떻게 이해해 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이 꼭 닫혀서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닿지 않는다면 어떻게 산 사람들의 세상인 이승을 견뎌낼 것인가. 너무나 사는 것이 힘이 들어서 어디로든 뛰쳐 나갈 마음밖에는 없었다. 또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내자신이 너무 가엾어서 더욱 더 힘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만든 감옥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은 또 그 사람이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녹을 줄 모르던 나의 마음이 그를 많이 생각하면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잃은지 7년만인 1990년 여름방학, 대학생이 된 작은 애를 데리고 랑군에 다녀 왔다. 그와의 儀式없는 이별은 받아 드리기가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동안 꼭 한번 다녀 와야 할 숙제를 풀기 위해서였다. (월간조선 1991. 1월호. 마지막 이별의 의식) 그곳은 정말로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상이었다. 왜 그런 곳에서 그가 마지막 숨을 쉬어야 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의사나 내 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나는 그 이후 天衣無縫의 그의 영혼을 내가 부뜰고 있는다고 내옆에 있고 놓아 준다고 내게서 멀리 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이 그의 영혼은 그대로 자유로워야 하듯 내 삶도 어느 누구와 상관없이 자유로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와의 결혼이 아름다울수 있었듯이 내가 어렵사리 배운 홀로 서기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었다.

생명이란 유한하기 때문에 그렇게 찬란하게 아름다운 것이다. 또 그와의 인연, 그와의 생활은 우리의 생명자체의 만남이었으므로 지금은 물리적인 존재로 보이거나 잡히지는 않지만 어디엔가에 사실로서는 엄연히 존재하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그와의 인연이 소중하게 생각들면서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 귀하게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제는 무엇이나 당연하게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의 아이들, 부모형제나 친구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까지도 독자적인 귀한 생명의 존재로 내가 그들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처음 생각으로는 그렇게도 무거워서 짓눌리던 '한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렇게도 기다려지던 작은 아이의 대학졸업도 무사히 이루어졌다. 아버지를 갑자기 잃었을 때 예쁜 계집아이같이 곱게 생긴 철 없던 국민학교 6학년짜리가 건장한 청년으로 우뚝 자란 것이다. 그 아이의 졸업식에서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실로 오래간만에 새털같이 가볍고 부드러운 희열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나의 뜨거운 눈물은 깨끗한 샘물처럼 내 가슴의 앙금을 씻어 내는 정화력을 가진 것을 나는 느꼈다.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하고 나는 내가슴을 꼬옥 끌어 안았다.인생에서의 도피란 아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자기로부터 도망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요새도 물론 갑자기 허허롭고 막막해지는 때가 있다. 특히 아름답게 해로하는 노부부를 보면 그렇다. 긴 세월 모든 풍파를 같이 이겨낸 사람들의 곰삭은 사이란 얼마나 서로 만만할까, 얼마나 따뜻하고 편안할까 하고 부러워 한다. 또 가까운 사람들이 정부에서 영예로운 직책을 맡게 되면 요새같이 마음 편한 세상에서 일하게 되는 사람들은 무슨 복일까 하고 부러워 하면서 마음 고생, 몸 고생하면서 일만 하다 간 남편이 갑자기 가엾은 생각이 나서 막 슬퍼진다. 나는 그럴때마다 내게 묻는 마지막 질문이 딱 하나 있다. "너 그럼 네가 그렇게 부러워하는 사람하고 너하고 바꿀래?" 대단한 오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의 거침없는 대답은 언제나 "아니, 그럴 수는 절대로 없어"라고 나온다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다.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