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같은 빗줄기가 비행기창을 쪼갤듯이 두들겨대고 있었다. 뿌연 시야에는 진흙탕에 잠긴 질펀한 논밭이 보였고 군데 군데 큰 나무와 전봇대, 허술한 집들의 위치로 보아 도로가 연결되어 있음직 했지만 차나 사람,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과연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일까?
정신없이 바글거리고 혼잡한 방콕을 떠난지 한시간도 안되는 거리의 랑군은
이 세상에서 내가 본 어디보다도 아득히 먼 곳에 있는 듯했다. 비행기는 착륙을 하지
못하고 초라한 시골 역사(驛舍)같은 작은 건물과 소방탑같은 관제탑이 바로 보이는
상공에서 계속 돌고 있었다. 30분, 40분이 지나도 착륙할 기미도 없고 그렇다고 무슨
안내 방송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나가는 승무원을 불러 세우고 영문을 물었더니
비가 너무 심해서 활주로가 잠시 침수되어 내릴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 방콕으로 다시 돌아 가는거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다. 비가 잦아 들면서
착륙안내 방송이 있었다. 비행기는 육중하게 내리면서 구멍이 많이 뚫린
활주로 위로 요동하면서 멈추었다.
YANGON INTERNATIONAL AIRPORT라는 붉은 글씨의 표시가 눈에 들어 오자 갑자기 호흡이 멎을 것 같앴다. 드디어 이 땅에 왔구나! 칠년의 지각 끝에.... 어쩌다가 이렇게 아득히 멀고 낯선 땅에서 그가 마지막 숨을 쉬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나 버렸을까. 너무도 기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었다.
1983년 10월 9일은 너무도 화창하고 아름다운 일요일이었다.
남편이 여행중이면 으례 느끼는 가벼운 해방감에서 친구들과 북한산에 등산을 갔다.
절정을 이룬 단풍은 불꽃같이 화려했고 억세풀 사이로 보랏빛과 노란 들국화가
어울려 피어 어디를 보나 한폭의 그림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귀국예정일인 25일까지 가을이 기다려 주었으면 하면서 그와 함께
꼭 한번 다시 올것을 다짐하며 나는 가을산에 흠뻑 취해서 마음이 들떠 있었다.
부부란 돌아서면 남이라는 옛말이 그렇게도 옳은 것인가.
나는 산에 취해 행복에 겨워있던 바로 그 시간에 내 남편은 만리타국에서
폭탄을 맞고 쓰러졌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는 그날의 들떠있던
나의 행복감에 대해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에 대한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부부라면, 아니 누구라도 20년 이상 가장 가깝게 살아 왔던 두 인간이라면
그 중 하나가 홀연히 이 세상을 떠나는데 어떻게 그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다고 해서,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해서 또 하나는 그렇게 딴청을 부릴 수가 있단 말인가.
가을 오후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하산길에서 느끼는 나른한 충족감은 주차장에 거의 다 와서 산산 조각이 났다. '다 죽었대?' '아니, 대통령은 살았대...' '누구 누구 죽었대?' '몰라, 많이 죽었나봐'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라디오를 들으며 나누는 소리에서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귀에 들어 오는 순간 다리가 휘청하면서 그 자리에 폭 고꾸라졌다. 한 친구가 얼른 나를 잡아 주고 다른 친구들은 얼른 차에가서 라디오를 틀었다. 사망자명단을 공식수행원부터 읽어내리고 있었다. '부총리....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김 재익....' 갑자기 눈앞의 모든것이 정지된 네거티브 필림같이 빛을 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니야, 그럴 수 없어, 뭔가 잘못 안 거겠지...' 너무도 강한 확신으로 내뱉은 내말에 친구들은 더욱 할말을 잃었다.
어떻게 집에까지 왔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미 그곳에는 사무실 사람들, 일가친척, 친구들이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동네사람들까지 우리집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지키고 있던 동생내외가 얼른 나를 끌어 안고 '언니, 괜찮아, 우리랑 같이 살면 되... 형부 안계신몫 우리가 다 같이 할께...'하고 흐느꼈지만 나는 오히려 맹숭맹숭했다. '설마, 이게 사실일까...' 집안에 들어가보니 시어머니(당시 88세)가 백짓장같은 얼굴로 눈을 감고 누워계셨고 그 주위에 일가친척이 모여 있었다. '아,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나는 죄스럽게도 순간적으로 엉뚱한 생각이 들어 잠시 안도감이 가슴을 놓아 주었다.
수행비서관이 나를 보자 '사모님!'하고 말을 못잊는데 나는 '괜찮아요. 혹시 부상이라면 몰라도 아무리 그렇게 쉽게 돌아가시지 않아요. 뭐가 잘못 된 거예요' 그는 기가 막힌듯 '공식발표가 있었읍니다... 빈소를 만들어야 하는데 사진이 있나요?'하고 조심스럽게 실무를 의논하였다. '아니예요, 확실한 것을 알 때까지 좀 있어 봐요..'. 엉뚱한 소리를 하는 나에게 그는 너무도 딱했던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사모님, 발표가 사실입니다.'
방에서 아이들이 쫓아 나왔다. 작은애(당시 만11살)는 울고 있었고 큰애(20살)는 달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아이들을 붙들고 방으로 들어 갔다. 방문을 꼭 잠그고 우리는 한덩어리가 된 채 한 동안 서 있었다. 숨을 크게 쉬고, 또 쉬고. 작은애의 오열에 우리 모두가 흔들렸지만 막상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고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승회야, 거짓말일거야. 뭐가 잘못된 거겠지. 그런데 또 이게 사실이라도 너 울면 안되. 엄마도 있고 형도 있고, 뭐 걱정이니. 아빠도 꼭 네나이에 육이오 나고 할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총살당하셨잖니? 그래도 아빠 얼마나 훌륭하게 크셨니. 너 아버지 안 계셔도 잘 클 수 있어. 아무 걱정 마.' '한회야 너는 20년이상 아버지가 길러 주셨어. 너는 이제 어른이다. 너는 엄마를 도와 주어야지. 우리가 승회를 훌륭하게 키워야 하지 않겠니. 그치?' 아무렇지도 않게 또박 또박 말이 나왔다. '어머니...' 두 아이들은 나를 더욱 세차게 끌어 안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서로에게 버텨 나갈 힘을 충전이라도 해주듯이.
그 후 며칠은 혼미한 기억속에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이 원경 당시 체육부장관이 장례준비위원장이 되어 운구를 위해 다음날인가 현지로 떠난다는 뉴스가 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가야지. 가서 내눈으로 확인해야지. 이대로 그냥은 안돼. 절대로 안돼.'산에서 내려오던 때부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가슴이 꽉 막히고 목구멍에 쇠고리라도 죄어 놓은듯 물도 넘길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폭탄이 터지는 것이 보이고 들렸다. 나는 밤에도 뜬 눈으로 그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앉아 있었다. 눈을 감기가 무서워서 그의 편안하고 깨끗한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랑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니 기운이 솟구쳤다. '유가족을 동행시킬 계획이 없다는데요'. '이건 사사로운 장례식이 아니니까요'. '정부에서 모든걸 주관하는데 개인행동은 안하는게 좋겠는데요'. 그런 것이 정부측의 반응이었다.
그렇게도 절실하게 가 봐야겠다던 생각이 그 정도의 설득으로 수그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내속에 잠재하고 있던 현실을 받아드리기를 거부하는 거센 고집이 나를 주저앉힌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그 미련한 고집의 대가를 치루고 또 치루었다.
거국적으로 치루어진 장례행사에서 나는 그냥 꼭두각시처럼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고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곤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비행장에 운구가 도착했을때 가족들이 이미 너무 탈진한 내 상태를 걱정하여 만류하던 것을 뿌리치고 나갔던 일, 그를 담은 관이 영정을 앞세우고 내 앞으로 다가 왔을 때 내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는 순간적으로 실신을 했던 아득함, 각자에게 배당된 앰뷸런스에 그와 같이 타자 버마사회주의 인민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관위에 덮여 있던 화환을 나도 모르게 뜯어 팽개 친일, 그리고는 그 차거운 관에 얼굴과 가슴을 밀착시키고 서울대 병원 영안실에 도착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일. 마치도 나의 입술의 온기와 심장의 고동이 그 차거운 알미늄상자를 통과해서 그에게 전해질 수 있다고 믿었는지...
영안실에 그를 안치하고 또 나는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집으로 돌아 왔다. 그를 땅에 묻을 때까지 만이라도 그의 옆에 붙어 있고 싶었다. 아무도 없이 단둘이만 있고 싶었다. 나는 병원에 남아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당시 영안실은 16분의 시신과 조문객으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어 있을 곳이 없었다.
인간은 의식(儀式)의 동물이다. 의식을 치루지 않고는 무엇이나 인정하지 못한다. 또한 의식에는 여러 단계가 있어야 한다. 공식적인 의식은 대외적인 것이지만 더욱 의미 있고 중요한 것은 그것에 관계되는 당사자끼리의 사사로운 의식이다. 우리가 처음으로 부부가 되었을 때 그렇게도 여러해동안 미래를 하나로 설계하고 같이 살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지만 혼배미사에서 서약을 했고 또 그뒤에 단둘이서 더욱 간절하게 서로에게 다짐한 후에야 우리는 부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우리가 헤어지는 시간에 나와 그사이에 아무런 의식이 없이 그냥 무우토막을 자르듯이 갈라 설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성대하게 온국민이 애도하고 치른 장례식이었지만 그것이 끝나 버리면 모두가 자신의 생업으로 돌아가서 다음날부터는 그냥 잊어버린다. 아무리 가까운 형제도 친구도 계속 나에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 국민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의식으로 나를 순국자의 미망인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붙여 놓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 갔다. 그러나 나는 그와의 둘만의 지극히 사적인 이별의 의식을 치루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썰물처럼 문상객이 지나간 텅 빈집에서 저녁이 되어 밖이 어스름해지면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느라고 방안을 서성거리며 절절매곤 했다. 정말 그가 죽었을까, 내가 묻은 그 관에 과연 그가 들어 있었을까... 의문이 나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어쩌자고 내가 내남편을 확인도 해보지 않고 남이 죽었다고 관에 담아다 주는 것을 그냥 땅에 묻고 흙을 덮었을까... 미쳤지. 정말 미쳤지. 내일은 꼭 가서 그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뚜껑을 열어 보리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국립묘지로 달려 간다. 어느덧 싸늘해진 날씨에 뗏장이 붙지 못한 그의 새 무덤에 서서 정말 맨손으로 내 손톱에서 피가 줄줄 나도록 땅을 파헤치고 싶은 충동에 미칠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랑군에 뛰어 갔어야 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다른 누구도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내손으로 그의 상처를 씻어 주고 깨끗한 새옷을 갈아 입혀서 내 가슴에 품고 단둘이서만의 이별의 의식을 치루었어야 했다. 그러고 난 후에야 관에 뉘어 주고 그를 땅에 묻을 때까지만이라도 그의 곁을 떠나지 말었어야 했다.
인간의 육신은 영혼을 담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라지만 우리는 그 그릇을 통해 영혼을 사귀게 되는 것이다. 그 그릇이 깨져서 영혼을 담지 못하면 그 영혼을 어떻게 접할 수 있겠는가. 육신이 없이 영혼에 닿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그의 육신이 깨지고 난 후에 실감하다니. 우리가 서로의 영혼을 사랑하는줄 착각하고 살아 온 것이 너무도 허망하고 어리석게 생각되었다.
미신은 커녕 과학적이라는 주역도 믿지 않고 살아 왔다. 궁합도 안보고 한 결혼이었다. 또 인간의 행과 불행이 자기할 탓이고 모든 일이 자기책임이라는 오만하고 철없는 생각으로 인생을 살아 왔다. 그래서 우리가 이룬 이 정도의 사회적 지위나 가정의 행복도 우리의 노력의 열매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불행은 어디서 온 것일까 순식간에 조각난 내 인생은 어찌 된 일인가. 무슨 못된 짓을 했길래, 무슨 미련한 짓을 했길래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나는 닥치는대로 심령과학에 관한 책을 읽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뒤집어 쓰고 그의 목소리로 그가 할 말을 한다는 복화술에 대한 것을 읽고는 더욱 안달이 났다. 그의 영혼이 멀리 가기 전에 불러 세워서 꼭 물어 보아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나는 영험한 스님들을 많이 아는 가까운 친구에게 그의 혼을 나에게 불러다 줄 수 있는 사람을 꼭 찾아 내라고 성화를 댔다. 그 친구도 내가 하도 딱하니까 누구를 통하고 통해서 김천 어느 산골 암자에 계신 보살 한 분을 알아 내었다.
내게는 유난히 견디기 어렵게 춥던 그해 겨울. 그 중에서도 제일 춥던 일월의 어느날 우리는 김천행 버스를 탔다. 창에는 두껍게 얼음꽃이 피어 밖은 햇빛이 환한 낮이 되어도 녹을줄 몰랐다. 하얀 꽃무늬 창호지문이 있는 방안에 앉아 있는 듯이 아늑하게까지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야릇한 기대감에 취해 들뜬듯한 마음으로 그냥 갔다. 버스를 내려 택시를 갈아 타고 그리고도 꼬부랑 산길을 살을 에이는 바람속을 걸어 갔다. 그리고 더욱 허망한 마음으로 그 곳을 떠날 때야 겨우 제정신이 들어 죄없는 내친구를 공연히 귀찮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도 또 온갖 망상에 시달리는 잠 못이루는 밤을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미친 짓을 해서 옆사람들을 괴롭혔다. 그의 혼을 한번이라도 불러서 작별이라도 제대로 하기 전에는 성이 차지 않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용하다는 점쟁이까지 찾아 다니고 몇백만원짜리 굿을 하라는 말에까지 귀가 솔깃해졌다.
교회에서 신부님, 수녀님, 교우들이 많이 방문해 주셨다. 몇번이나 몇번이나 듣게 되는 구약성서의 욥의 이야기. 하나님은 욥을 특별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모든 것을 주셨고 더욱 더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셨던 모든 것을 도로 걷어 가시는 시련을 내리셨다. 그는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시련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고 순종하여서 마침내 하느님의 얼굴을 뵙게 되었다. '하느님은 특별히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시련을 주십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니 받아 드리십시오' 나는 이런 말에 대해 격렬하게 분개하였다. '하느님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도 해로하고 복 좋게 잘만 살더라.' '가정파괴가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당신이나 갖지 그래...' 나는 정말로 사람들의 말이 지겨웠다. '아, 하느님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어 주세요...' 이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혼배미사 때 서약에서 우리는 분명히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라는 조건을 인정했지만 죽음이란 이렇게 우리에게 빨리 오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 먼 훗날 우리가 늙어서 노인이 된후에나 오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가끔 주위에서 남편이나 아내를 잃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건 다 남의 일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런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우리 둘중 하나가 갑자기 죽는다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너무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너무 엄청난 일이라 생각하기조차 거부한 것이리라. 사람은 누구나 불행을 예습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 나에게 사람들은 성경구절, 불경구절, 말의 성찬을 차려 놓고 억지로 떠먹이려 하였다. 내 귀는 딱 닫혀있고 내머리는 터질 것같아 아무 것도 들어갈 틈새가 없는데도. 오히려 아무말 없이 와서 내 얼음장같은 손을 두손으로 싸잡아 녹혀 주거나 내 처진 어깨를 따뜻하게 포옹해 주어 겁이 나서 떨고 있는 나를 산사람의 온기로 안심시켜 주었던 사람들만이 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앞에서만 터질 것같이 꽉찬 슬픔의 독을 서서히 풀어낼 수가 있었다.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눈물을 흘려서 내속에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감정이 조금씩이라도 전달되어 들어올 자리를 만들 수가 있었다. 만약에 내가 그때 그때 땅을 치고 통곡을 할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속이 꽉 막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인 체면이나 교양때문에 의연한척 하고 견딘 위선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
남들보다 어려서 우리는 일생을 같이 해야할 숙명을 서로에게서 느꼈고 그때부터 같이 자라왔다.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없던 젊은 시절에도 우리는 결핍감을 모르고 살았으며 희망이라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산때문에 우리의 나날은 작은 행복과 웃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좀 더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와 여건에서 활발하게 이상을 실현할 황금의 중년기와 성취감과 감사가 가득한 평화로운 노년기를 그리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던 것과 비슷한 중년기를 누리고 있었기에 노년기도 우리의 그림과 비슷하게 와 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 그림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내것이라고 내손에 꼭쥐고 있던 귀중한 보석이 손을 펴는 순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 다시는 주을 수도 없이 그냥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느님을 무섭게 원망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다가도 또 금새 무서운 생각이 들어 빌고 매달렸다. 내 남편을 한순간에 거두어 가시는 무자비한 하느님이 정말 화가나서 우리애들을 해치지나 않을까 하는게 그때는 제일 겁이 났다. '하느님 제발 애들만 잘 크게 해주시면 제게는 무슨 어려움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읍니다' 계속 나를 두고 하느님과 흥정을 벌렸다. 마치도 내가 하느님께 값어치나 있는 상품이라도 되는듯이.
남편에게는 끝없이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아무리 자신의 의사로 서로를 선택한 사이라도 살다 보면 잡다한 매일의 생활에서 서로를 상하게 하고 화를 내고 오해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그런데 그 사람은 나에게 모든것을 다 잘해주기만 했고 나는 그에게 다 잘못한 것 같앴다. 너무도 후회스러운 일 투성이었다.
내가 당한 현실을 받아 들일 수 없는 마음, 대상도 모르는 분노, 남편에게 대한 죄책감과 원망감, 그리고는 짓누르는 암담감. 몇시간이고 몸은 꼼짝 못하고 앉아서 마음속은 무섭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런 꼴의 내가 너무도 불쌍했다. 그러나 자기연민이 심할 수록 그 반발 또한 심했다. '그래, 그렇게 괴로우면 네가 살 수 있겠니? 죽지 않고 배기겠니.' 차마 어린 자식을 두고 내목숨을 내가 끊을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속으로 그냥 이대로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이렇게 마음이 괴로우면 얼마 살지 못하겠지 하는 가학적인 쾌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죽기는 너무 쉽고 살기는 너무 어려웠다. 죽음의 유혹은 너무도 감미로웠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이 기도는 항상 나에게 끝없는 감동을 주던 것이었다. 원죄까지도 포함한 인간의 조건에서 애써 노력을 해도 하느님의 눈에 차지 못하는 인간의 가엾은 실상. 불교적인 해석으로도 지금의 자신과는 상관없이 타고난 업, 인간은 참으로 절대자의 앞에서는 약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그의 자비를 구하는 기본적인 갈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나에게 평화를 주소서...' 나는 그때 당장의 괴로움을 벗어 나기 위해서 하느님께 ' 나를, 나를, 하고 보채기만 하였다.
그러나 결국 내가 당한 일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친구나 가족의 도움은 절대적인 필요조건이었으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나는 내 힘으로 내 자신과 싸워 이겨야 했다. 이 싸움에서는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승리란 있을 수 없었지만 만약에 패배한다면 내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끝장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본전찾기의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않되었다. 끝없는 용기와 이성과 지혜가 필요했다.
Oh God, Give me th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change./ Give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And the wisdom to distinguish between the two. ( Thomas C. Hart) 나는 이 시를 오래 전에 처음 읽었을 때 '참 옳은 말이로구나'라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내가 정말로 이 시의 내용을 절실하게 매달려서 갈구해야 할 상황에 처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계속 직장인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남편에게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자부심도 항상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부릴 수 있는 허세였을까?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에 든든한 남편은 후광이고 울타리이다. 졸지에 폭풍치는 광야에 바람막이라고는 없는 맨몸으로 혼자 서있는 듯 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극도로 민감한 과잉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또 어떻게 혼자 기를 것인가. '아비없는 후레자식', '홀에미 자식', 우리사회는 불우한 사람에게 특히 잔인하다는 것을 그때 뼈져리게 느꼈다. '아유, 어머니, 우리 아버지가 누군 줄 세상이 다 아는데 별걱정을 다 하시네...' 작은 이가 나의 걱정을 가볍게 웃어 넘겼다. 어느새 되찾은 그의 맑은 표정은 불행의 자국이라고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유리그릇 같다. 아무리 큰 슬픔도 앙금으로 붙어 남지 않고 말끔하게 씻으면 새것처럼 투명하게 깨끗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엄청난 일을 당하고도 잘 자랄 수있는 생명의 힘이 있는 것이다.그리고 시간은 아이들에게 크나큰 축복이었다. 시간은 말없이 흐르면서 아이들을 길러 준 것이다. 아이들에게서 그를 느끼고 계속 그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기쁨이며 동시에 가장 예리한 아픔이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이야말로 나를 사람꼴로 남아 있게해 준 가장 큰 힘이었다.
텅 빈 비행장인데도 비행기는 건물과 상당히 먼 거리에 멈추고 승객을 내려 놓았다. 그렇다고 버스로 실어 나르지도 않아 모두 그냥 미지근한 열대의 비를 맞으며 걸어서 비행장건물로 향했다. 여러나라를 여행해 보았으나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낯설었지만 각오한 대로였다. 이 여행은 내가 자신에게 지워 준 보속의 숙제였다. 나는 늦게나마 그가 마지막 숨을 쉬던 땅의 모습을 내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모두 내가 그와 치루어야 하는 작별을 위해 필요했다.
그동안 몇차례나 나는 랑군방문의 가능성을 요로에 타진하였으나 번번히 이루지 못했다. 대통령이 가장 가슴아프게 생각하시는 일이기에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되어서인지 또는 너무나도 자명한 경호실수가 민망해서인지 그냥 덮어놓고 좀 가만 있어 보라는 것이었다. 이번 여행은 전적으로 현재 태국에 계신 정 주년 대사님의 도움으로 실현되었다. 내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감사한 일이다.
비행장에는 뜻밖에도 그곳의 권 병현대사 부인께서 대사관직원과 함께 나와 계셨다. 낯선 땅에서 너무도 반갑고 고마웠다. 당시의 권 대사님은 그 때 본국발령을 받으시고 귀국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을 때였지만 정말로 친절하게 맞아 주시고 모든 것을 미리 주선하여 그 다음날 아웅산묘소를 방문 할 수 있도록 그쪽 정부에 협조를 얻어 놓으셨다.
이차대전 후 영국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버마는 당시 동남아에서 가장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나라였다. 민족의 지도자 아웅산은 정적에게 암살당해 비운에 갔으나 지금도 버마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1961년 군부 쿠데타로 네윈이 정권을 장악하고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천명하여 김 일성과 각별한 사이로 친북한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우리나라와도 동시수교관계를 갖고 있었다. 1983년 10월의 아웅산묘소 폭발사건의 터러범이 북한인인 것으로 밝혀지자 단호히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내세워 국호도 영국식 이름인 버마에서 미얀마라는 원래의 이름으로 최근에 바꾸고 숫자까지도 아라비아 숫자를 쓰지 않고 자기네 고유의 숫자를 고수하고 있어 거리의 표시는 물론 자동차의 번호판도 읽을 수가 없었다. 군부의 세력타툼에서 쿠데타가 계속 일어나지만 그들은 다 한통속이라 서로 죽이거나 쫓아 내지도 않고 연금상태에 놔둔단다. 가장 최근의 소요는 1988년에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군부독재 시위였는데 많은 사람이 죽고 그 이후 오늘까지 대학이 폐쇠되어 있다. 또 지난 5월에는 현군부에서 민정이양을 약속하고 치른 총선에서 아웅산의 딸인 수키 아웅산이 압도적인 승리를 걷우자 민정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그녀를 연금상턔에 놔두고 있다.
혼란한 정치노름에서 민생은 뒷전인 듯했다. 경제정책의 부재인지 아니면 그릇된 정책의 강행인지 한 나라가 운영을 잘못하면 이렇게도 후퇴를 할 수 있는 것인가? 1950년대까지도 세계 제일의 쌀수출국이었다.비옥한 대지에 넘치는 수자원, 웬만한 농업기술과 관개시설만 있어도 삼모작도 가능한 나라에서 농업정책, 토지정책이 어이가 없어 아무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는다. 4월말에서 시작되어 9월말에나 끝나는 지루한 장마중에는 신선한 야채 구경이 어렵다고 그날 저녁을 초대해 주신 대사부인께서 말씀하셨다. 생필품의 부족은 심각하지만 그런대로 익숙해지고 보니 착한 이곳 사람들의 인정이나 인생관에 감동되어 이 곳생활을 퍽 의미 있게 보내셨다고 대사님이 웃으셨다. 계속되는 계엄령하에서 10시면 통행금지라 저녁 후 서둘러 호텔로 돌아 오는 길은 시내인데도 가로등 하나없이 거리가 깜깜했다. 습기가 무겁게 내려 앉은 날씨의 탓도 있었지만 이 나라의 암울한 사회상의 반영인듯 했다.
랑군에서 최고급 호텔이라는 이냐 레이크호텔은 남편의 일행이 마지막 밤을 보낸곳이다. 1960년대에 소련의 원조로 지었다는 이 건물은 매우 낡아 있었으나 아름다운 작은 호수를 옆에 끼고 큰 나무들이 심어진 공원같은 넓은 정원이 인상적이었다. 천정이 높은 넓은 방의 벽이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있었고 홋이불이나 수건들이 다 걸레같이 낡고 눅눅했다. 수도물을 틀어 보니 계속 뻘건 진흙물이 나왔다. 방문열쇠가 망가져 있어 그냥 자기가 불안했지만 복도 끝에 앉아 있는 순하게 생긴 객실지배인이 걱정말라고 해서 그냥 의자 하나로 막아놓았다.
그도 이런 방에서 마지막 잠을 잤을까? 다음날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운명의 장난. 정말 단순한 장난이 아니고야 그가 이 멀리에 와서 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의미를 어디다 부칠 것인가. 너무나도 많은 생각에 잠이 들지 못했지만 그래도 7년의 세월이 나를 이만큼 다스려 주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어쩔 줄 모르던 격정, 갈등이 많이 순화되었고 이제는 내가 사람노릇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마음을 달래고 나의 육신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으니까.
다음날 아침. 전날의 폭우는 거짓말 같이 가시고 깨끗하게 씻긴 온세상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아웅산의 묘소. 83년의 폭파사건 이후 그 가난한 예산에서도 당장 복구를 했을만큼 이 곳은 이 나라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인가보다. 외국의 국가원수 방문시 꼭 들러 경의를 표해야 하고 국민들에게는 성역으로 특별한 날에만 참배가 허용된다. 옛날의 목조건물 대신 어머어마한 대리석 구조물을 세워 놓았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상징한다는 별이 하나 싯뻘건 바탕에 그려진 영웅기가 그 대리석 구조물 윗부분을 이루고 있어 미적 감각은 전혀 없는 건축물이었다. 경내는 잘 정돈된 별로 크지 않은 공원이었다.
우리는 권대사님이 준비해오신 화환을 놓고 묵념을 하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경건한 장소이기는 하나 우리의 기도는 사실상 이 장소의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어색했다.
이곳 어디쯤에 그가 서 있었을까. 그가 쓰러진 정확한 위치를 안다면 그의 마지막 온기를 앗아 간 그 땅에 엎드려서 내 가슴으로 그것을 되찾을 길이 없을까 하며 안타까이 그냥 울었다. 대사님은 아무말도 없이 내 어깨를 쓸어 주시고 부인께서도 계속 깨끗한 휴지만 건네 주시며 부축을 해주실 뿐 그냥 울게 놔두어 주셨다.고마우신 분들.
사건 직후 나를 제일 괴롭혔던 생각은 그가 무서운 고통을 당하지나 않았을까, 그의 의식이 지속되었더라면 육신의 상처보다도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그 착한 사람이 얼마나 안타깝고 괴로웠을까 하는 것이었다. 책임감이 남달리 강한 그가 90의 노모를 남기고 끔직히도 아끼던 두 아들을 다 키우지도 못하고 떠나야 했던 그 심경을 생각만 해도 그가 가엾고 또 가엾었다.
내가 그동안 제정신으로 견뎌온 것은 나에게 무거운 짐을 본의 아니게 떠맡기고 안쓰럽고 안타까워 하는 그를 안심시켜서 편하게 쉬게 해 주는 것이 내생전 그에게 미안했던 일을 갚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어려운때나 기쁠때나 항상 그는 내옆에 있어 주었다. 큰아이가 무사히 군대를 마쳤을때도 작은 아이가 자기가 원하던 대학에 무난히 들어 갔을 때도 나는 먼저 국립묘지에 달려가서 우등상장을 받은 국민학생같이 그가 나를 칭찬해주기를 기대했고 또 나는 그의 도움을 정말로 고마워하지 않았는가. 결국 나도 7년 만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이다. 이제는 정말 주님의 평화가 그와 나, 우리주위의 모든사람에게 있기를...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끝없이 맑은 여름하늘에 얇은 구름이 살짝 떠 있었다. 아, 이렇게도 세상은 어디나 아름다운 것을... 다시금 가슴을 찌르는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너무도 허망했다. 이 짧은 의식을 위해 지난 세월을 그렇게도 기다렸던가.
찬란한 햇볕 아래 다시 본 랑군의 거리는 전날밤보다는 생명이 있었다. 중심가를 제외하고는 길도 제대로 포장이 안되어 있었지만 워낙 자동차가 없으니 온 거리가 조용하고 평화롭기까지 하였다. 열대의 울창하고 큰 수목이 도시안에 많아서 공원같이 아름다웠지만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우두커니 표정없이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대학이 닫혀 배움터를 잃은 젊은이들, 일터라고는 없는 시민들은 그냥 손놓고 있는듯 했다. 기후조건 때문에 최소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일이 없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가난이란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듯 했다. 대부분이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들은 오래전부터 물질과 행복을 무관하게 생각할 수 있는 듯했다. 남녀 구별 없이 두폭짜리 소창무명으로 만든 통치마에 헐렁한 웃도리, 폐품타이어를 오려 만든 쌘달. 그들은 가난으로 평등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불만도 없고 도둑이나 깡패등의 사회 불안요소도 없다고 한다. 정신적인 풍요가 물질적인 빈곤을 진정 다스리고 있는 것인가.
나는 처음에 우리의 불상사에 대해 버마 정부를 많이 원망했다. 얼마나 일을 허술히 하면 자기나라를 방문하는 국가원수일행이 이런 참사를 당하게 되는 것인가 하고. 그러나 이 나라의 국민성이나 사회분위기로 보면 이런일은 그 사람들로서도 상상이 안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손님끼리 남의 집에 와서 살생을 벌린 것이다. 그때의 경호는 완전히 우리측에서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의 책임은 전적으로 우리 정부에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우리 정부에서는 북한을 비방하기만 했지 자신들의 경호소홀에 대한 책임추궁도, 거기에 따른 조처도 별로 없었던 것이 유가족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 고쳐못할 일에 대한 인간의 무력함.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허술한 비행장의 출국수속절차를 거쳐 방콕으로 돌아 가는 버마항공기를 탔다. 비행기속이 너무 낡어서 뭐하나 제대로 붙어 있는 것이 없었다. 기계정비나 제대로 되어 있으려나 하는 걱정이 들자 그래도 아직 죽기는 무서워 하는 것 같은 자신이 우스워졌다. 비행기창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칙칙한 밀림과 구비구비 흐르는 진흙강물이 어느틈에 뭉개뭉개 피어 오른 장마 먹구름 사이로 강렬하게 비치는 햇살을 받아 꼭 조명을 받고 있는 무대같이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내 일생에 다시는 오게 되지 않을 땅.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도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래, 한번으로 치루자. 그와 단둘이 나누지 못했던 마지막 이별의 의식을 이것으로 치룬 것으로 하자. 그는 갔지만 그동안 나는 그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떠난 그를 부뜰고 있는 나의 집착은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 그에게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자유를 주자. 그러면 나도 조금은 평화롭고 자유로울 수가 있겠지.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그의 영혼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훨훨 날고 있을꺼야..
'바람부네/ 바람 따라 세상 끝까지 나도 갈래.....바람끼리 워이워이 가는게 나는 좋아/ 먼저 가서 기다려 주는게 제일 좋아/ 바람 따라 멀리멀리 나도 갈래/ 가서 바람의 색시나 될래.' (김남조. 바람.) 그의 영혼이 바람같이 워이워이 먼저 가다가 햇살 아늑한 어느 산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려 줄 것을 좋아라고 믿고 사노라면 언젠가 또 다시 그를 만나 그의 색시가 될 수 있을까? (1990)
